연극 「앞서 가는 멋쟁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본격적인 언어연극을 시도해 실험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심은 젊은 그룹 「앞서가는 멋쟁이 HQ(Head Quarter)」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보여주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극계에 자그마한 불씨를 지피고 있다.
『언어연극이라 하면 주제가 언어인 동시에 표현의 형태도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극 형태입니다. 인간의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서만 풀어봄으로써 이미 습관화된 언어가 은연중에 언어폭력·소외감으로까지 발전된다는 언어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주는 작품이죠.
관객은 내버려둔 채 제작팀만 기분 내는 식인 종래의 실험연극과는 달리 이들이 내놓은「언어연극」은 삶의 위기의식을 언어를 통해 조명해보겠다는 제작팀의 취지가 관객들에게도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주목된다.
언어연극을 표방하고 나선 이 그룹은 극단 명칭도 아니고 단지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뭉친 모임이다.
이 그룹이 등장한 것은 83년 5월, 고대극예술연구회의 멤버였던 최유진(34·기획) 고금석(34·연출) 최선택(34·연기)이 주축이 되어 연극동호인그룹을 형성, 40여명의 회원을 받아들이면서 비롯되었다.
모든 회원들이 직장을 가지고 있고 「생활 속의 연극」 을 뿌리내리기 위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발굴하는데 그들의 열의를 가다듬고있다.
이들이 처음 내놓은 작품은 83년 5월 말 문예회관소극장에서 공연한 「피터·한트케」 원작 『카스파』.
오랫동안 산 속에 버려져 동물과 함께 살아온 「카스파」가 인간세계 속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언어를 매개로 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삶의 희열과 언어를 배우고난 다음 언어 때문에 고통받고 억압받는 삶의 패배를 잘 대비시킨 이 작품은 아무런 극적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나는 옛날 그 어떤 사람처럼 되고싶다』라는 문장 하나만으로 언어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독문학을 전공한 고금석씨가 연출을, 칠레유학 중 잠시 귀국한 최선택씨와 주진모씨(27)가 연기를, 최유진씨가 기획전반을 맡아 총지휘했고 공연자금 출자는 「앞서…」 그룹회원들이 조금씩 보탰는데 연기자도 연출자도 출연비 없이 의욕만으로 버텼다.
단 한 명이 출연하는 무대를 위해 40여명의 스탭진이 총동원되었다. 3회의 앙코르공연기록, 극기야 이들이 처음 선보인 『카스파』가 서울 비평가 그룹에서 주는 83년도 우수연극으로 뽑히면서 이들의 작업은 놀랄만한 힘을 인정받기도 했다.
연극평론가 양혜숙씨는 『「카스파」공연에서 보여준 조명시설·TV활용·음향효과 등의 무대처리는 소극장무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면서 생소한 언어연극이 감동을 주는 차원까지 이해된 것은 이들 그룹이 맺은 결실이라고 지적한다.
그룹이 결성된 지 이제 8개월. 지난해 『카스파』와 부조리극 『건축사와 앗시리황제』를 공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에도 언어연극의 꾸준한 시도와 독일작가의 작품을 소개해볼 계획이다. 올해의 무대는 연극 외에 무용·음악하는 회원들이 늘어남에 따라 연극과 무용·음악과의 접합을 시도해볼 계획.
연출가 고금석씨는 「앞서…」그룹이 지탱해나가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공연으로 연륜을 쌓아나가는 길 뿐』이라면서 그룹이 나아가야 할 성격이 뚜렷하게 부각되어야하는 점이 앞으로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밝혔다. <육상희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