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영토엔 도량형 깃발 먼저 꽂는 게 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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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 1990년대 초반 글로벌 무선통신업계는 중요한 변곡점을 맞는다. 1세대 아날로그 통신기술이 2세대 디지털로 바뀌어서다. 글로벌 기술 표준의 대세는 미국의 CDMA 방식과 유럽연합(EU)의 GSM이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 강국이었던 일본은 이 둘 대신 독자방식인 PDC를 채택했다.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에서였다. 하지만 일본의 선택은 틀렸다. CDMA를 채택한 미국·한국과 GSM을 택한 유럽의 기업들은 약진한 반면 일본 기업들은 줄줄이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글로벌 표준을 외면한 혹독한 댓가였다.

 #2. 미국 어도비가 1993년 공개한 새로운 전자문서 포맷 PDF는 편의성과 효율성 덕분에 컴퓨터 사용자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럼에도 기존의 문서작성 프로그램의 아성을 깨기는 쉽지 않았다. PDF가 글로벌 문서 프로그램으로 발돋움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국제표준화기구(ISO)가 2005년 5월 PDF를 전자문서 장기보관 표준으로 승인하면서다. 이후 PDF는 모바일·동영상 프로그램으로까지 진화해 전 세계로 영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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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사례는 글로벌 경제에서 표준이 얼마나 중요한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표준은 국민 편의와 기술 개발 촉진을 위해 제품·서비스의 규격을 비롯해 생산방법·기술·용어를 통일하는 것을 뜻한다. 기원전 7세기 고대 이집트의 도량형에서 출발한 표준은 산업화시대 제조공정 규격화로 발전한 뒤 글로벌 무역 규범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전 세계가 국제 표준 선점을 위해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유무역시대의 역설이다. 자유무역협정(FTA) 영토가 넓어질수록 각 나라가 무역기술장벽(TBT)을 통해 표준 선점을 위한 규제를 더 많이 내놓고 있어서다. 무역기술장벽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수입 제품에 대해 자국의 기술규정·표준·인증을 적용해 수입을 어렵게 하는 수단이다. 일종의 비관세장벽이다. 상대국에는 표준 규제를 풀 것을 요구하는 반면 자국에 유리한 규제는 지키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성시헌 국가표준원장

 당장 한국도 표준 전쟁 한복판에 놓여있다. 한국은 미국·EU·호주를 비롯해 11건의 FTA를 발효했다. 중국·베트남과 같은 교역규모가 큰 아시아 국가와의 대형 FTA를 타결한 상태다. 그런데 FTA 영토가 넓어질수록 기술규제 범위도 커지고 있다. 갈수록 늘어나는 ‘TBT 통보문’이 대표적이다. 이는 기술규제 강화나 신규 기술 규제 도입을 FTA 상대국에 알리는 절차다. 한국은 올해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85건의 통보문을 띄웠다. 지난해 45건(11위)보다 크게 늘었다. 미국(181건)·EU(97건)과 같은 선진국은 한국보다 통보문을 보낸 횟수가 더 많다.

 표준 선점이 중요한 이유는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시장에서는 생산품 의 규격이 통일돼 있어야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다른 나라와 경쟁할 때는 중요성이 더 커진다. FTA의 무역기술장벽을 통해 자국의 기술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른 국가의 표준을 받아들여 비용을 절감하고 무역을 확대할 수 있다. 실제 유럽 주요 선진국은 표준성장률이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독일을 예로 들면 1900~96년 표준이 연 평균 12.9% 성장한 덕분에 경제는 연 평균 3.3% 성장했다.

 한국도 그동안 국가표준(KS)을 기반으로 국제표준 선점을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2만개 이상의 KS규격을 보유한 것을 기반으로 국제표준화기구(ISO)의 표준순위 9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FTA와 시너지를 내 성장률을 높이려면 질적인 성장이 절실하다. 성시헌 산업통상자원부 국가표준원장은 “선진국은 대부분 기업 내 전문가가 국가의 표준 개발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반면 한국 기업의 참여율은 30% 수준에 그친다”며 “대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고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성과를 표준화로 연계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 말했다.

세종=이태경·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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