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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 대출 금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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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23 금리 조정으로 차등금리 (Prime rate) 제도가 도입됐다. 신용이 단단해서 돈 떼일 염려가 적은 기업에는 싼 금리를, 그렇지 못한 기업에 대해서는 비싼 금리를 차등해서 메기겠다는 것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종전에도 0.5%의 차이를 둬서 이 같은 제도를 운용해오다가 「공연히 금리 체계만 복잡해졌다」는 이유로 82년 6·28 조치 때 없앴던 것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다만 종전에는 한국은행이 일률적으로 우량업체를 골라 0.5%의 차등 금리 혜택을 줬었으나 이번에는 은행 별로 알아서 10%, 10.25%, 10.5% 등으로 금리를 매긴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줄 때는 항상 위험 부담이 따르니까 차주의 신용을 봐서 금리를 따로 매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큰 은행들끼리 기준 금리를 정해놓고 거기다가 돈 빌려달라는 나라의 경제 사정을 면밀히 따져서 가산금리 (spread)를 얹어 받아내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또 한편으로는 물건 많이 팔아주는 단골손님은 우대하여 가급적 싸게 해준다는 뜻도 있다. 돈 떼일 염려도 없을 뿐 아니라 단골손님에게는 잘해줘야 여유 자금이 생길 때 자기 은행에 예금을 많이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은 무엇을 기준으로 싸게 또는 비싸게, 돈 값을 달리 매겨서 빌려주는 것인가. 미국의 경우 은행 본부에서는 기준금리만 정해주고 실제로 기업마다 적용하는 금리는 전적으로 지점장이 판단해서 결정한다 (보통 1%범위 안에서).
평소 거래실적·예금·사업전망, 심지어는 개인 사생활이나 성적까지도 감안해서 지점장이 독자적으로 대출여부 결정은 물론, 금리까지 매긴다. 얼마로 빌려주는지는 절대 비밀이다. 그것이 알려지면 그 기업의 신용 등급이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요, 그렇게 되면 신용을 밑천으로 하는 기업 경영 자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은행이 매기는 점수가 공신력이 있고 또 기업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은행측이 큰돈을 떼었다면 그 대출을 결정한 지점장이 모든 책임을 진다. 충분한 권한을 주는 대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피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야말로 알아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금융 자율화의 본보기다.
정부 설명으로는 이번 차등 금리 제도 도입이 바로 금융 자율화의 걸음마 연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로 봐서 이 같은 차등 금리 제도를 원래 뜻에 맞게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선 은행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기업 신용을 평가할지 주목거리다. 은행 자신부터 금리운용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훈련이 워낙 부족한데다 큰 기업일수록 빚을 잔뜩 지고있기 때문이다.
재무구조가 건전한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야 오히려 중소기업들에 우선적으로 싼 금리를 적용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부도 위험을 따진다면 아무래도 작은 기업보다는 큰 기업이 더 안전하다.
그렇다고 대기업 위주로 싼 금리 혜택을 준다면 편중 융자에다 저금리까지 이중·삼중으로 특혜를 준다는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고….
한편 대기업일수록 빚은 빚대로 지고 있으면서도 여유 자금으로 은행 예금을 좌지우지하는 형편이니 예금 실적을 무기화해서 싼 금리를 강요 (?) 할 경우 어떠한 「원칙」도 배겨나기 힘들게 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값은 고사하고 물건 자체가 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자금의 만성적인 초과 수요 현상이라는 것이다. 늘 자금이 달리니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은행돈 얻어 쓰는 것 자체가 이득이다. 게다가 은행 금리 수준 자체가 워낙 낮은 탓으로 0.5% 정도 더 비싼 금리를 문다고 해도 시중 금리에 댈 게 아니다.
결국 기업의 신용에 따라 진짜 차등 금리를 매기려면 자금의 수급이나 금리 수준이 웬만큼 맞아 돌아가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차등 금리 제도라는 것은 금융이 잘 돌아가면 저절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돈 안 떼이기 위해 철저한 신용조사와 경영 평가를 할 것이고, 기업으로서는 탄탄하게 신용을 쌓고 이익도 많이 남겨야 은행한테도 큰소리치며 싼 금리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용에 따라 차등 금리 제도가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사채 시장이다. 사채전주나 중개업자의 수첩에는 거래 대상 기업마다 A, B, C… 등급을 매겨 소상하게 신용상태가 기록되어있고 여기에 따라 철저하게 차등 금리가 적용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은행 지점들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로는 우리나라 금리 체계를 적용 받게 되어 있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들 판단에 따라 오래 전부터 기업마다 차등 금리를 매겨 왔다. 예컨대 1백만 원을 빌려주면서 대출금의 20%, 즉 20만원을 대출 즉시 예금 (주로 이자 한푼 안 붙는 요구불 예금) 한다는 조건을 붙인다.
물론 공 금리는 10%라 해도 사실상 80만 원을 빌어쓰면서 10만원의 이자를 무니까 실제 부담금리는 12.5%인 셈이다.
이처럼 외국은행 국내 지점들은 기업마다 강제 예금의 비율을 달리 매기는 방법을 통해 최고 연 15%의 높은 이자까지 받아내고 있다. 그 대신 신용이 단단한 기업에 대해서는 예금 요구를 하지도 않을뿐더러 즉석에서 돈이 나온다. 까다로운 서류 절차나 대출 커미션도 필요 없다.
어찌 보면 미울 정도로 야박스럽고 달리 보면 이들 (사채업자나 외국은행 지점들)이야말로 정말 「은행답게」 돈 장사를 할 줄 안다고 할만하다.
차등 금리 제도란 금융 자율화의 첫걸음으로서 연습삼아 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이 진짜 자율화되면 맨 마지막 단계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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