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정부, 독일 경제 살리려 칼 뽑았지만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세계 3위의 경제대국 독일이 수술대에 누웠다. 450만 명을 웃도는 심각한 실업 사태, 꽁꽁 얼어 붙은 내수 시장으로 독일 경제는 숨쉬기조차 어렵다. 해마다 수백억 유로씩 쌓이는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로 국고는 거덜났다. 기업의 체질이 허약해지면서 '제조업의 왕국'이란 명성도 퇴색하고 있다.

22일(현지시간)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사진) 신임 총리를 집도의로 한 좌.우파 연합정부의 수술진이 '독일 병'의 환부를 도려내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수술 결과를 아직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 퇴락하는 독일 기업=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이 유럽 대륙의 맹주 자리를 스위스에 빼앗겼다"고 보도했다. 1985년 영국을 제외한 주식의 시가총액 순위에 독일은 무려 7개 기업을 10위권에 올렸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시가총액 10대 기업 가운데 독일 기업은 한 곳도 남지 않았다. 대신 제약회사인 노바티스가 2위에 오른 것을 비롯한 식품회사 네슬레(3위), 제약회사 로쉬(6위), 투자은행인 UBS(7위) 등 4개 스위스 기업이 10위권에 포진했다. 독일 기업 가운데선 20년 전 2위였던 다임러 벤츠는 미국의 크라이슬러를 인수하면서 21위로 추락했다.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바이엘은 43위로, 지멘스는 3위에서 11위로 떨어졌다.

FT는 독일 기업의 부진에 대해 "20년 전만 해도 자동차.기계.화학 업종이 각광을 받았지만 현재는 주도권이 제약.통신 업종으로 넘어갔다"며 "독일 기업이 이 같은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주류 경제국에서 밀려나 있던 스웨덴이 노키아를, 스페인이 금융회사인 BSCH-BCO 산탄데르와 텔레포니카 등 괄목한 만한 기업을 배출한 것도 독일 기업의 쇠락을 부추겼다.

◆ 독일 경제 회생 가능한가=지난 2002년 이후 독일의 재정적자는 유럽연합(EU)의 안정성장협약 기준인 국내총생산(GDP)의 3%를 훌쩍 넘어섰다. 이를 줄이기 위해 새 정부는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세금 인상, 지출 억제 등을 통해 향후 4년간 매년 350억 유로(약 44조원)씩 적자를 메워갈 계획을 내놨다.

또 경제활성화를 위해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는 여러 조치도 내놓았다. 현행 '6개월 이후 정식 고용을 해야 한다'는 규정을 '2년 이후'로 다소 완화하고 실업연금 등 간접인건비를 대폭 줄일 방침이다. 그러나 경제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위르겐 투만 독일 전경련(BDI) 회장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실망감을 나타냈다.

새 정부는 4년간 경기부양을 위해 250억 유로(약 31조원)를 투자하기로 했지만 신설되는 수당을 제외하면 실제 투자될 돈은 당초 예상액의 절반에 불과하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올리는 방안에 대해 중소기업의 반발이 거세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효과도 미지수이다. 경제주간지 비르츠사프츠보헤는 "해고 규정이 완화됐지만 반대로 기본 고용 기간을 최소 2년으로 정해 신규고용 창출 효과가 전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도이체방크의 토마스 마이어 연구원은 "정부는 근본적인 수술을 미룬 채 안이한 대책에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대연정 정부의 태생적인 한계에 있다. 경제 체질개선을 위한 수술작업 중에 좌.우파 양측이 모두 자기 목소리만 높일 경우엔 병세 호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깨어나지 못하는 독일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신임 메르켈 총리가 연정을 지휘하며 내놓을 다음 처방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