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20일경주방폐장선정] 고준위 방폐장, 여론 눈치보느라 미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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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아오모리현 로카쇼무라 지역에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공장 및 중간저장시설을 짓고 있다. 완공 목표는 2007년이다. 아오모리현은 이미 중저준위 방폐장이 있는 곳으로 주민들이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도 자발적으로 유치했다. 일본은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처리해 연료로 쓸 수 있는 우라늄.플루토늄 등을 분리하기로 한 세계 5개국 중 한 나라다. 핵폭탄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때 패망한 나라지만 원자력에 대한 국민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갖은 노력을 한 결과 원자력뿐만 아니라 방폐장 부지 결정 등에서도 우리나라처럼 고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기로 한 나라는 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고 영구히 땅속에 묻어 버리기로 했다. 이들 국가 역시 사용후핵연료 처리장을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유치했다. 미국.독일.캐나다 등이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 31개국 중 이같이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침을 결정한 나라는 10개국이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나머지 국가는 여론 눈치를 보며 관망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 처분 방침을 결정한 국가들은 10~20년에 걸쳐 치밀한 검토와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저준위 방폐장에 임시저장소 격인 대규모 중간저장소를 함께 건설하려다 실패했다. 그 이후로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공개적인 논의나 한국 실정에 맞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도 거의 없다.

한 원자력 전문가는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책 결정을 미룬 감이 있다"며 "그러나 정부가 비핵화 선언을 한 데다 미국이나 중국.일본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재처리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식이나 장소 선정 등은 단기간에 결정하기 어렵다. 이를 감안하면 원전별로 있는 사용후핵연료 저장소를 아껴 쓰면 아직 10~15년은 남았다고 안심할 단계가 절대 아니다.

유치 지역에 줄 현금 등 각종 혜택도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건설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한 지역에 일시불로 3000만 프랑(약 54억원), 연간 세금 납부에 의해 50만 프랑(약 9000만원) 등을 지원했을 뿐이다. 원전을 가동하면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을 운영 중인 25개국의 경우 프랑스보다 많은 지원을 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는 일시불 3000억원에, 연평균 세수 42억원, 방사성 폐기물 반입 수수료 연평균 85억원(한국수력원자력㈜ 예상) 등의 지원을 하기로 했다.

한국수력원자력㈜ 방사성폐기물사업본부 관계자는 "한국은 외국과 사정이 달라 많은 지원을 해서라도 처분장 부지를 하루빨리 확정지어야 했다"며 "첫 단추가 끼워져야 두 번째 단추인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한 고준위 처리장도 잘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런 지원을 해준 경주의 경우 나중에 경주가 자발적으로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소를 유치하겠다고 해도 법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의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한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할 수 없도록 못박았기 때문이다. 정부 스스로 고준위 폐기물 처리에 대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조성경 교수는 "국민의 인식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위해선 대국민 홍보를 잘해야 한다"며 "미.러의 국제 공동폐기장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주 방폐장 결정 때처럼 주민 투표가 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22일 디지털정치문화연구소에 따르면 방폐장 부지를 결정한 '주민투표 방식'에 대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경주는 물론 군산.영덕.포항 등 유치경쟁을 벌였던 다른 지자체 주민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소는 방폐장 부지 선정 당시 정부 의뢰로 여론수렴 작업에 참여했던 기관이다. 이 연구소 유재숙 이사는 "고준위 방폐장은 중저준위와 안전도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주민의사를 묻는 방식으로 투명하게 추진하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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