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7)이대통령의 조건-제80화 한일회담(10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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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7년12월31일-. 만4년여의 회담동결상태를 마감하는 합의문서조인을 불과 30여분 남겨놓고 이대통령이 취소 훈령을 내리니 주일대표부의 김유택대사는 물론 본부의 조장관이나 내 입장도 말이 아니었다.
나는 경무대의 박찬일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연유를 물어봤다. 그러나 박비서관도 이대통령의 내심을 아직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박비서관에게 어떻게 하든 이대통령의 거부이유를 알아주도록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같은 처사는 외교관례로 보아 보통 망신이 아닐뿐더러 나아가 선량한 어부를 마구잡이로 가두어둔다는 일본측의 선전공세로 가뜩이나 악화된 국제여론을 한층 악화시켜 모든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 쓰게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도록 최선의 설득을 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서울에서 이같은 공작을 꾸미고있는 사이 흥분과 낙담에 싸여있던 동경의 김대사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습책을 모색했다. 김대사는 서대문의 이기붕 국회의장댁에 전화를 걸어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국가적 망신도 망신이지만 이제와서 뚜렷한 명분 없이 조인을 취소한다면 주일대표부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고 국제적으로도 크게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만송(이의장 아호)선생, 대표부직원들도 사기가 떨어져 모두들 보따리를 싸들고 귀국하겠다고 하는 형편입니다.
사태는 본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하다는 것을 인식하셔서 만송선생께서 이대통령을 좀 설득해 주셔야 겠읍니다.』
김대사의 간곡한 설명을 들은 이의장도 『아이구 참, 그거 왜 다 임박해 가지고 그렇게 일들을 하는지!』하면서 최선을 다해보겠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진해에서 휴양중인 이대통령은 이의장·조장관·경무대비서관·「다울링」주한미대사 등으로부터 사태의 심각성에 관해 잇단 전화를 받고 하오 늦게야 속내를 밝혔다.
이대통령은 31일 중으로 조인하되 미국해석각서를 비밀문서로 하라는 지시였다. 이대통령은 그때까지 미국해석각서를 비밀로 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가 없었는데 이로 미루어 이미 말했듯 이대통령이 미국해석각서에 대한 노골적인 불쾌감과 반감의 정도가 짐작되었다.
나는 대통령의 이같은 지시를 미처 암호로 옮겨 타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평문으로 바로 훈령했다. 아마 시간이 하오6시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일이라도 이때쯤이면 일이 끝날 시간인데 하물며 일본외무성은 28일 상오로 사실상 종무한 터였으므로 암호로 옮기고 해서 비밀유지를 고려할 형편이 도저히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날 온종일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대사도 이 전문을 보고는 바로 「오오노」(대야) 일본외무차관에게 전화로 『나는 지금부터 오늘밤 11시 사이에 귀측이 편리한 시간에 언제든지 조인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통보했다.
「오오노」차관은 『불행중 다행이나 이번은 정말이냐』고 다그쳐 김대사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고 한다.
김대사는 이에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며 이대통령의 최종훈령을 설명하자, 「오오노」차관은 이미 각 언론기관에 모두 배포했으므로 곤란하다는 대답이었다.
김대사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나는 「오오노」차관에게 「그러나 당신네 언론계는 정부의 정책에 협조를 잘 하는 것으로 아는데 외무성에서 그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그는 하는 데까지 해볼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들의 동정을 염탐해 보았는데 그 결과 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도 기자들을 우리 대표부에 슬그머니 보내 우리측의 진의가 사실인가를 탐지해 가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다른 선약을 취소하고 관저에서 기다리고있던 「후지야마」(등산애일랑)외상은 얼마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조인할 준비가 다 되어있으나 그 전에 나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관저로 들러달라고 연락해왔다.』
조인에 앞서 사소한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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