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이디어맨 최대 주주 꿰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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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황두연 사장이 아셈타워 32층 사무실에서 ISMG 소개 책자들고 사업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영국계 마케팅 서비스 전문그룹인 이지스가 지난달 초 종합광고대행업에 진출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 광고대행 사업을 총괄할 본사를 한국에 세웠다.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32층에 둥지를 튼 ISMG코리아가 바로 그 회사다. 이지스의 지난해 매출은 14조원이다. 이지스는 한국 기업인과 합작해 ISMG코리아를 설립했다. ISMG코리아 황두연(43) 사장이 이지스의 합작 파트너다. 최대 주주도 이지스가 아니라 황 사장(지분 60%)이다. 거대 다국적 기업이 신사업 법인을 세우면서 본사를 한국에 두고, 경영권을 한국 기업인에게 넘겨줬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한마디로 황 사장의 아이디어와 배짱이 이뤄낸 결과였다.

황 사장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그는 1990년대 말 이지스 계열사의 고위 임원을 알게 됐다. 만남이 잦아지며 이지스의 임원은 황 사장에게 한국 내 사업을 상담하게 됐다. 황 사장은 이지스 측이 잘 모르는, 당시의 한국 비즈니스 관행을 세세히 설명해줬다. 국내 대기업은 이지스 같은 국제적 기업을 파트너로 택하기보다 광고나 마케팅 전문 계열사를 만들어 일을 맡기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점, 이런 상황을 파고들어 사업 기회를 만들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것 등을 얘기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직접 얼굴을 대하거나, 또는 e-메일을 통해 이지스 그룹의 한국 내 사업을 컨설팅했다. 이지스와 일하면서 황 사장은 이지스가 하고 있던 마케팅 서비스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지스의 사업 구조도 면밀히 살폈다. 이지스는 마케팅, 시장조사, 광고 집행 등 전문 분야별 계열사를 따로 두고 전 세계 60여개 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다.

2003년 황 사장은 이지스에 새로운 사업을 제안했다. "광고 집행뿐만 아니라 광고까지 제작하는 종합광고대행사를 만들자. 그러면 이지스 그룹은 마케팅뿐만 아니라 광고 분야까지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종합광고대행 분야의 글로벌 본사는 한국에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그룹의 사업 구조와 인력 배치를 탄력적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광고, 시장 조사, 마케팅 전략 수립 등 이지스 그룹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 중에서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한 뒤 필요한 인력을 각 계열사에서 서로 주고 받자고 주장했다. 즉 고객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 팀을 꾸리자는 제안이었다. 황 사장에 따르면 그 전까지 이지스는 계열사별로 알아서 고객을 확보하는 식이어서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국을 본사로 하자는 제안은 바로 받아들이더군요. 며칠 안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복병이 등장했어요. 지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끈기로 이긴 셈이죠."

종합광고대행업의 글로벌 본사인 ISMG코리아의 지분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황 사장은 자신이 60%를 출자하고, 이지스는 40%만 할 것을 고집했다. 황 사장은 "저쪽이 대주주가 되면 언제 내 의자를 치울(해고할)지 몰라 내가 최대 주주가 되겠다고 우겼다"고 말했다. 반면 이지스는 "우리가 투자하면서 어느 업종에서도 최대 주주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며 반대했다. 황 사장은 이지스에 '누가 사업 아이디어를 냈는가. 또 이 사업을 하려면 내가 꼭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려면 연락도 하지 말라'는 e-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연락을 끊었다.

"한동안 연락이 안 오더군요. 제가 먼저 다시 접촉해볼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그러면 이후의 협상에서 계속 주도권을 뺐기겠기에 버텼죠." 그로부터 석 달 뒤 이지스가 먼저 연락을 했다. 황 사장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뒤 서류 계약 및 법률 검토 등을 거쳐 지난달 ISMG코리아가 탄생했다. 1일에는 미국 뉴욕과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 미국 지사를 열었다. 앞으로 유럽과 중국 등지에도 지사를 개설할 계획이다.

해외 법인은 이지스가 100% 출자할 예정이다. "이지스는 세계 60여 개 국에서 현지에 맞는 광고.마케팅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해외에 진출하려는 우리 기업들이 ISMG코리아의 문을 두드리면 이지스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 어디든 그곳에 맞는 광고.마케팅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권혁주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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