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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하퍼 리가 나오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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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아직도 읽지 못했지만 라디오 광고는 또렷이 기억난다. “이상하다, 아직 우리에게 눈물이 남아 있다니”라는 광고 문구가 우선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그 광고 대사를 연기한 여성 성우의 목소리가 뭔가 절박하고 다급했다. 도대체 이 책 속에는 인생의 어떤 비극이 담겨 있길래…,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미국 작가 하퍼 리의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라디오 책광고 얘기다. 광고는 기자가 책을 사도록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책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는 데는 성공했다. 대략 20년 전, 지금보다 라디오의 힘이 세 책광고가 라디오에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던 시절 얘기다.

 그 하퍼 리가 요즘 국내 문학 출판인들의 관심사다. 그의 신작 국내 출판권에 대한 비공개 입찰이 3일 진행됐다. 출판계에 따르면 국내 판권을 따내는 출판사가 당장 이날 결정되지는 않는다. 계약금처럼 작가에게 지급하는 선(先)인세가 성에 차지 않아 하퍼 리 측이 ‘노(No)’할 경우 2차 입찰이 벌어진다. 그럴 경우 선인세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하퍼 리 신작의 선인세는 얼마로 결정될까. 전작의 흥행성적이 판단자료가 될 것 같다. 1960년 출간된 『앵무새 죽이기』는 지금까지 4000만 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4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된 결과다. 지금도 매년 100만 부씩 팔린다.

 국내 성적도 신통했다. 라디오 광고의 덕을 본 90년대 한겨레출판의 실적을 뺀, 문예출판사의 2002년 이후 판매 부수만 30만 부 정도로 추정된다. 더구나 신작은 『앵무새 죽이기』의 속편 격이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고발한 전편 주인공들의 20년 후를 다룬다. 전작에 매료된 많은 국내 독자가 신작도 살 가능성이 있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적어도 1억원 선”으로 전망했다. 대개 1만3000원 하는 소설책 10만1000권 정도의 저자 인세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선인세가 높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출판도 산업인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더 큰돈도 쓸 수 있다.

 하퍼 리의 미국과 대비되는 한국의 문학판 상황이 딱해서다. 또 다른 문학 편집자 얘기다.

 “한국 문학판에는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간다. 살아남으려면 그 벨트 위에 올라타야 하고, 일단 올라타면 이른바 대작을 쓰기 어려운 구조다.”

 소수의 대형 문학출판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운영하는 문예지의 원고 청탁 등에 고분고분 응하지 않았다가는 자칫 시장에서 존재감이 사라져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각종 문학상 심사, 강연 활동 등은 당장 입에 달지만 정작 작품 쓸 시간을 뺏는다. 어정쩡한 작품을 쥐어짜듯 써내고는 다시 문학 ‘일용 시장’에 나서야 하는 악순환이다.

 해결책은 출판사가 쥐고 있다. 가능성 있는 작가에게 5000만원쯤 쥐여주고 2년 정도 기다려줄 수는 없을까. 『앵무새 죽이기』 같은 작품이 나오도록 말이다.

신준봉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