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7)|제80화 한일금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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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기시」일본정권의 발족은 3년여를 동결상태로 몰아 넣고있던 한일 회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기시」수상은 취임 첫날 나를 통해 이박사에게 자신의 한일관계에 대한 소신을 피력한데 이어 3월26일 이박사의 생신에 축전을 보내는 등 이박사의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또 외상자격으로 의무성간 부들에게 억류자 상호석방 교섭을 독려했다.
57년 봄을 전후해 외무성 아주국장과 주일 대표부간부들은 억류자 상호석방합의를 통한 회담재개를 위해 부지런히 접촉했고 그 결과로 상당한 진척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4월초쯤 조정환외무장관이 나를 부르더니 『이대통령은 아마 주일 대표부 인사를 쇄신할 모양』이라며 홀가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정도로 호전되고 있는 즈음에 교섭당사자를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세간의 화제에 생각이 미치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한일관계정상화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온 주일대표부의 김용직 공사와 유태하 참사관간에는 조직의 수석과 차석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정도이상의 깊은 불화가 있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나로서는 일본이 가깝다보니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많아 그들이 순전히 호사가적 취미에서 김·유씨 양자의 관계를 사실이상으로 과장해 전파하고 그러다 보면 눈덩이 구르듯 불어났지 않았나 이해해왔다.
또 일을 하다보면 각자의 개성과 행동양식이 달라 마찰 정도야 의례 있게 마련이 아닌가.
그러나 세간의 평은 가혹했다. 특히 56년9월 김·유씨 양자관계는 언론이 크게 다루고 사설로 문제를 삼을 정도로 발전해 이대통령이나 외무부로서도 우려를 금치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한 신문은 9월6일 『김·유양씨 간에는 장시일에 걸쳐 반목과 분규를 거듭해온 점에 비춰 이번 귀국에서 정부 고위층의 단을 각기 요청할 것으로 관측된다』고 보도한데 이어 18일에는 『주일대표부의 내분설과 요청되는 외교진 쇄신』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주일대표부에 심각한 불화가 있어왔다는 항간의 풍설을 지적, 주일대표부의 인사쇄신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 신문은 김공사가 18일 『외교활동을 하는 외교관들에게 무슨 시간의 여유가 있어 알력이나 분쟁이 있겠는가』라고 내분설이 사실무근임을 해명했음에도 24일 다시 사설 이를 다룰 정도였다.
언론은 차석인 유참사관의 인책을 주장했던 것인데 이박사의 안목은 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 고심을 했던 것으로 나는 듣고있다.
조장관의 말을 들은 지 며칠 후 나는 경성고상(서울상대전신) 파 구주제대의 선배이자 전한은총재였던 김유택씨의 전화를 받았다.
김선배는 주일대사로 임명될 것 같으니 그동안의 한일관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싶다며 경무대 박빈일 비서관과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김선배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박사를 만난 자초지종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대통령께서 들어 오라고해 경무당에 갔더니 나를 보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일시 귀국한) 김용직공사에게「김공사는 일본에서만 5년이지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어려운 자리에 오래있었으니 이번에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데로 보낼테야. 아마 파리로 가게될거야. 여기 앉은 김총재가 후임으로 갈테니 사무인계나 잘하게」하시지 않겠소』
지금도 주미·주일대사 등 1급지공관장인사는 통치권자의 의중이 거의 작용하는 것으로 알지만 당시에는 그도도 한층 심해 장관의 입김이 전혀 닿지 않았다.
이박사가 세간의 요망과는 달리 협상중의 공관장을 바꾸기로 한데는 유참사관의 왕조시대의 군신관계 같은 충성심을 높이 산 것도 한 요인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경제통인 김유택씨를 일본에 보내 대일 경제 외교를 강화하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는 알고있다.
이대통령은 우선 그를 주일대표부 경제고문으로 임명해 김씨의 예정된 대사임명을 모르던 한일양국인사들의 의표를 찔렀고 그 결과로 일본경제계는 경제전문가의 대표부 보강방침이 한일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이대통령의 뜻일 것이라고 상당히 호의적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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