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의 시네·라마 사이언스] 과거 돌아가 할아버지를 사라지게 했다면 … 그럼, 여행하는 나의 존재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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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이 불러오는 인과율 파괴의 결과를 보여주는 영화 `타임 패러독스`의 한 장면. [조이앤시네마]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야.”

 여성 보컬그룹 빅마마의 노래 ‘체념’의 한 소절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적어도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가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백 투 더 비기닝’도 과거로의 시간여행으로 현실을 바꾸고 싶어하는 10대들의 성장담을 그렸다.

 시간여행은 과연 가능할까. 미래로의 여행은 과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은 늦게 간다. 때문에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듯 중력이 강한 천체 근처에 갔다 오면 나이를 덜 먹게 된다.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우주여행객들은 먼 미래를 경험하고 돌아오는 셈이 된다. 광속에 근접할 만큼 빠른 속도로 우주여행을 하고 오는 경우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특수상대성이론의 ‘시간지연 효과’다. 이런 현상들은 이미 실험을 통해 검증됐다.

 반면 과거로의 여행은 다르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경로가 수학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이 실제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학 풀이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가령 누군가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조상을 죽이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할아버지가 자손을 낳기 전에 죽으면 과거로 돌아갈 손자가 아예 없어진다. 때문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죽을 일도 없게 된다. 인과율에 위배되는 이른바 ‘할아버지 모순’이다.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순환고리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주된 줄거리다. 최근 개봉한 ‘타임 패러독스’는 인과율이 파괴된 순환고리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줬다.

 지난해 대학원 수업 때 학생들에게 “타임머신을 설계하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었다. 한 학생은 보고서 끝에 “어쩌면 타임머신이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인류파멸의 기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남겼다. ‘터미네이터’나 ‘타임 패러독스’ 같은 영화를 보면 그 학생의 우려가 기우만은 아닐 듯하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이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가는 수학적 풀이에 대해 “아직 우리가 잘 모르는 ‘연대 보호(chronology protection)’ 기제가 작동해서 모두 기각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떤 과학자들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더라도 이미 정립된 역사를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무리 허공을 날고 싶다고 해도 현실의 물리법칙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간여행 중 역사를 바꾸려는 ‘자유의지’가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만약 정말 타임머신이 개발돼 너도나도 역사를 바꿀 수로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바꾸고 싶은 과거는 다른 누군가에겐 계속 유지하고 싶은 과거이기 쉽다. 그렇다면 과거를 먼저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고, 그 경쟁의 승자는 현재 힘 있는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훨씬 더 많은 과거를 선점하게 된다면, 타임머신이 개발된다 해도 보통 사람들이 과거를 바꿔 현재를 개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실에 불만이 없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시간여행으로 역사를 바꾸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미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와 있다고 생각하고 현실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 지금의 현실은 미래의 과거이므로.

이종필 고려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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