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9) 제80화 한일회담-인질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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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일회담이 중단된 50년대 중반의 4년동안 양국간을 숨가쁘게 긴장시킨 것은 이른바 인질외교였다.우리가 평화선을 침범하는 어선과어부를 나포하고 일본은 한국인 밀입국자단속을 강화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인질외교는 우리측이 보다 극성스러웠다고 할지는 모르나 일본측도 대용조처로 한국인 밀입국자단속을 시작하고 불법체류자에 대한 검색을 한층 강화했다.
그래서 일본어부들을 억류중인 부산 일본인수용소와 한인 불법입국자들을 가둔 나가사끼(외기)의 오오무라(대촌)한인수용소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56년초 부산수용소의 재소자 현장을 보면 형기 만료자 2백67명 형기 복역중인자 3백70명,미결수 44명등 총6백81명이 수용되고 있었다.
오오무라수용소에는 밀입국자 1천58명을 포함해 1천4백58명이 억류돼 있었다.이중에는 제2차대전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한 4백명의 우리 동포들이 사소한 잘못으로 장기간 억류상태에 있던 것도 포함된다.
일본은 특히 우리 정부의 오오무라수용소 방문요청마저 거절한채 부당한 학대와 고문행위등을 일삼고 있었다.말끝마다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부산에 억류중인 일본인들을 석방해 달라고 요청하면서도 그들은 오오사까(대판)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우리 교포1명을 고문으로 치사시킨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부산수용소의 일본인대우가 참혹하다고 선전하여 국제여론을 자국에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고 획책했다. 당시 갈홍기공보처장은 일본의 이같은 모략에 대해 석방돼 귀국한 일본어부가 부산수용소의 대우가 일본선원학교의 대우보다 나았다고 우리정부에 보내온 감사의 편지를 공표해 반박했으며 이대통령도 56년3월19일 부산수용소를 시찰해 내외를 놀라게까지 했다.
정부는 여러차례에 걸쳐 오오무라수용소의 우리 동포들을 석방하라고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는 전전부터 일본에거주한 4백명의 교포들을 한국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석방할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우리 정부도 54년7월19일부터 형기를 마친 일본어부들을 일본에 돌려 보내지않고 계속 억류했다.
그전에는 나포된 어선과 어구를 몰수했으나 선원은 형식적으로 6개월에서 1년사이의 체형을 언도한후 특사라는 명목으로 될수록 조기에 석방시키는 인도적 배려를 해왔던 것이닷
사태가 이쯤 되자 일본측은 억류자의 상호교환 제의를 하는 한편 일본조야에서는 그들의 잘못은 전혀 고려하지않고 별의별 기계를 동원해 대한압력행위를 도모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소하는 방안△대한경제단절 방안△재일한국인의 추방안등을 제시, 자국정부의 결단을 촉구했다.
일본어업계의 아우성은 한층 세차고 격렬해 일본정부 마저 큰 골칫거리였다.55년12월5일에는 일본어민대표 5백여명이 우리 대표부를 포위하고 대표부내로 난입하려고 시도하면서 『한국정부를 타도하라』 『한국정부에 대해 미국은 원조를 중지하라』 고 외쳐댔다.
56년1월1일에는 일본 14개현지사들이 시모노셰끼 (하관) 에서 회동해 한국이 평화선 철페를 거부하고 일본어선들을 계속 나포할 경우 일본정부는 남한출신의 14만여 재일교포를 강제로 한국에 송환하라고 요구하는 결의를 했다.
국내적으로 이같은 거센 압력을 받고 있던 「하또야마」 정권은 우리측과 상호송환교섭을 벌여 부산에 수용중인 형기만료된 일본어민과 오오무라수용소에 억류된 전전 일본거주 4백명의 우리교포를 동시에 석방키로 56년4월2일 합의한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내의 이견으로 그실현이 어렵게 되자 일본정부는 엉뚱하게 그들중 일부를 북한에 송환시키려는 음모를 꾸며 우리측에 압력을 가하는 추태를 보였다.우리측이 끝까지 이같은 획책에 말려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일본외무성은 상호 동시석방에 동의했으나 법무성이 석방 대상자가 한국에 송환되는 조건이 아니라면 석방에 응할수 없다고 버텨 「하또야마」수상마저 법무성을 휘어갑을수 없었다고 한다. 법무성은 한국인 석방자가 일본에 그대로 눌러살 경우 사회불안요인이 된다는 이유로 1년이상을 버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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