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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비례대표 확대를 논하기 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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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중앙선관위가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대폭 늘리자고 제안했다. 25일 국회에 제출한 ‘정치관계법 개정의견’을 통해서다. 현재 지역구 246명, 비례대표 54명으로 돼 있는 국회 구조를 지역구 200명, 비례대표 100명으로 바꾸자는 내용이다. 선관위는 비례대표 확대의 명분으로 지역주의 완화를 내세웠다. 선관위의 안은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눠 비례대표를 권역별로 뽑고 지역구에서 아깝게 떨어진 후보 일부를 해당 권역의 비례대표로 구제하는 형태다. 새누리당은 호남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영남에서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역주의 완화라는 대의명분이야 대찬성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과연 이 제도가 정치개혁을 촉진할지에 대해선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전국구(全國區)가 전국구(錢國區)라는 얘기를 듣던 시절도 있었다. 당 주변에서 A의원은 50억원, B의원은 30억원 하는 식으로 재력가 비례대표 의원이 얼마를 쓰고 배지를 달았는지가 화제로 떠돌던 게 불과 엊그제다. 그나마 요즘 돈 공천 문제는 많이 나아졌다지만 계보 심기 논란은 여전하다.

 지역구 공천은 아무리 당 대표라도 마음대로 못한다. 그러나 비례대표 공천은 당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19대 총선만 해도 새누리당(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 비례대표엔 ‘박근혜 키즈’가, 민주통합당(한명숙 대표 체제) 비례대표엔 친노·운동권 출신이 대거 입성했다. 엉망진창이었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공천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비례대표가 두 배로 늘어나면 비례대표 공천을 통한 특정 세력의 사당(私黨)화 논란이 훨씬 거세질 게 뻔하다. 지역구 선거였다면 진작에 걸러졌을 수준 이하의 의원이 대거 양산될지 모른다. 19대 국회에서도 논란을 빚은 의원 중 유독 비례대표가 많았다는 느낌이다. 최근 만난 여당의 중진은 “솔직히 지금 지역구 의원 중에도 전문가가 수두룩한데 비례대표를 둘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예전부터 정치권·학계 일각에선 비례대표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독일 모델의 영향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성공한 제도가 정치·역사적 조건이 크게 다른 한국에서도 잘될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나. 비례대표 확대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당 대표직 폐지와 같은 철저한 당내 민주화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비례대표 공천 시스템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무턱대고 비례대표 숫자만 늘리는 건 득보다 실이 클 것 같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