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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오래된 시집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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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최근 읽은 뭉클한 기사 중 하나는 지난 25일 한겨레신문의 ‘글 깨친 기형도 시인의 어머니, 팔순 돼 아들 작품 앞에 앉다’란 기사다. 제목대로다. 시인의 팔순 노모가 구립 한글 교실을 다니며 남몰래 한글을 깨우쳤다는 얘기다. ‘유명 시인의 어머니가 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자신을 숨겨오다가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에게 『기형도 전집』을 선물했다. “아들 생각 날까봐 아들 시는 싫다”고 했던 노모다. “여전히 아들 시는 잘 모르겠고, 성경 말씀으로 쓴 (이해인) 수녀님 시는 알겠다”고 했다.

 처음 그의 시를 읽던 날을 기억한다. 1985년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아침에 펴 든 신문에서 신춘문예 당선작인 ‘안개’를 읽었다. 습기를 머금고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 물안개가 신문지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음울한 냄새가 났다. 모두가 김남주나 박노해를 읽던 시절, 세상과 조화를 이룰 줄 몰라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본 듯했다. 이후 기형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됐고, 어렵사리 청년기를 통과하는 내게 ‘질투는 나의 힘’ ‘빈집’ 같은 시를 써주었다. 몇 년 후 그가 종로3가 극장에서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스물아홉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의 기억은 새삼 얘기하지 않겠다. 이런저런 직장을 거쳐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을 땐, 그가 한때 몸담았던 직장 후배가 됐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책장 한쪽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을 꺼내 든다. 그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상당한 책을 내다버리거나 처분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 시집은 여러 권 샀고, 여러 권 선물했다. 읽던 책을 주기도 했다. 지금 책은 90년 11월에 산 것이다. 10쇄. 2500원. 옛날엔 첫 장에 책을 산 날짜와 감상 글을 써놓곤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내 글씨가 어리고 낯설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28만 부 53쇄를 찍었다. 폭발적이지는 않아도 어디선가 상처받은 영혼들이 여전히 기형도를 읽는다는 얘기다. 여전히 인생이 아프단 얘기다.

 물론 기형도의 절망을 사랑했던 나는, 그의 죽음 후에도 오래 살아남아 세상에 부대끼고 세상과 적당히 어울리며 덕지덕지 나이 먹은 중년이 됐다. 시집을 사고, 읽고, 선물하던 일조차 까마득하다. 시를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될 만큼 난 문제 없나, 행복한가.

 오늘은 광화문 길을 걸어 시집을 사러 가야겠다. 다음달 7일이면 어김없이 그의 26주기가 돌아온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