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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한지붕? 아니 한동네! 신 대가족 옹기종기 외둥이 "안 외로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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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수현 드라마가 늘 그렇듯 한옥 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사는 대가족이 등장했던 이 드라마를 두고 '현실에 없는 판타지'라든가, '아날로그적 시대에의 향수'라는 표현이 쏟아졌다.
한마디로 대가족이라는 가족형태 자체가 현실에선 찾아보기 드문 판타지며, 더욱이 구성원들이 별다른 갈등 없이 서로 위하며 어울려 사는 모습은 현실에선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자식들을 품고 사는 김수현식 대가족은 자취를 감춰가는 게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 동네, 또는 한 아파트단지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와 형제자매가 모여 '따로 또 같이' 사는 신(新) 대가족은 얼마든지 많다. 사생활이라는 그럴듯한 푯말을 내세워 점점 축소지향으로 치달았던 우리네 가족관계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가족해체 시대에, 거꾸로 모여 사는 이유를 들어봤다.

관계맺기의 피곤함, 대가족에서 위안 받다

학원 가려 여행 가려
억지로 그룹 짓기?
그런 걱정은 덜었죠

유치원 다니는 딸 하나를 둔 맞벌이 엄마 최유진(34)씨. 주위에서 하도 영어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얘기하기에 뒤늦게 방학 중 유아 영어학원을 알아보다 금방 그만뒀다. 가는 곳마다 최소 서너 명씩 그룹을 지어오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맞벌이로 바빠서 아이 반친구들 이름도 겨우 알 정도인데 그룹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아예 학원 보내길 포기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최씨만 겪는 일이 아니다. 놀이터에 노는 애가 없다고 다들 집에서 혼자 노는 게 아니다. 삼삼오오 짝지어 미술 배우러, 운동하러 다닌다. 아이들끼리 절로 친해져 그룹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엄마들의 짝짓기 노력의 결과다. 엄마가 만들어주지 않으면 친구조차 사귀기 어려운 시대에 엄마들은 내 아이가 이런 그룹에 못 끼일까 늘 노심초사다.

소외에의 두려움은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모임에 한 번이라도 빠지면 다음에 불러주지 않을까봐 기를 쓰고 모든 모임에 가기 때문에 백수들이 제일 바쁘다'는 우스갯소리도 관계 맺기의 피곤함이 담긴 뼈있는 농담이다.

신 대가족제는 이런 두려움을 완화해 준다. 친구와 친척이 물론 다르기는 하지만 모여 살면 이런 불안감과 조급함에서 어느 정도 초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와 세 자매가 모두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김윤희(42)씨는 "애들이 박물관 같은 데 가기를 싫어해서 꼭 친구들과 무리지어 보내야 하는데 그룹짓기가 항상 수월한 게 아니다"면서 "온 가족이 모여 사니 아무 때나 조카들이랑 같이 보낼 수 있어 다른 집에 비해 그런 번거로움이 훨씬 덜하다"고 말한다. 또 조카들이 모두 같은 학교 동창들이라 부족한 정보를 메우기에도 편하다.

노인들 입장에서는 가까이 살다 보니 손자 손녀 볼 기회가 늘어 그 자체로 마음에 위안을 받는 경우가 많다.

외로운 아이들, 대가족에서 형제를 만나다

사촌은 마을 친구
같이 놀고 공부하고
양보의 미덕 쑥쑥

신 대가족제의 최대 수혜자는 아이들이다. 외둥이들이 많은 요즘 주위에 사는 사촌들이 친구인 동시에 친형제자매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혼자인 아이들은 형제가 없다 보니 양보의 미덕이나 남을 배려하는 맘이 부족하기 쉽다.

신 대가족을 이뤄 사는 아이들은 친구처럼 사촌끼리 서로 집을 매일 몰려다니며 함께 살다시피 해 자연스레 형제 간 우애나 예절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은 물론 언니.오빠까지 모두 아이 하나씩만 둔 채 한동네에 모여 사는 김모씨. "애들이 모두 유치원생이라 그저 친구로만 지내지만 좀 더 크면 캠프나 유학까지 함께 보낼 생각"이라고 말한다. 피가 섞였다고 해도 자주 얼굴 안 보면 남만도 못한 게 친척이지만 늘 어울려 살다 보니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친해 마음이 놓인단다.

신 대가족, 은근한 속박이 되지 않으려면

급할 때 애 봐주고
김장도 같이 하지만
사생활 침해는 NO

급할 때 서로 아이를 봐주거나, 김장할 때나 할인점에서 물건을 살 때 품앗이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신 대가족제만이 누리는 혜택이다. 잔치할 때도 한집만 음식을 전부 준비하는 게 아니라 각 집에서 한두 가지씩만 해와도 된다는 간편함이 있다.

전통적인 대가족제는 이런 모든 장점에도 가족구성원의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돼 행동 제약이 많다는 단점 때문에 꺼렸다. 하지만 신 대가족은 이런 단점은 빼고 장점만 살려 자발적으로 몰려 사는 요인이 됐다.

자발성이야말로 신 대가족제의 가장 큰 특징. 형태는 비슷하더라도 자발성이 결여된 경우엔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는 주장도 있다. 한 건물에 시부모와 시누이와 함께 사는 장윤희(36)씨.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경제권을 쥔 시부모님 때문에 할 수 없이 시댁 식구와 부딪치며 살다 보니 갈등만 늘었다.

또 아무리 모든 형제가 모여 살아도 모든 가정 대소사를 챙기게 되는 늘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도적으로라도 이런 점을 서로 배려하는 게 중요하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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