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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차이 나는 차이나] 닉슨·부시는 칭화대, 푸틴은 베이징대로 간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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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은 칭화대를 방문했다. 2002년 2월 조지 W 부시(가운데) 당시 미국 대통령이 칭화대를 찾아 강연을 하자, 같은 해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은 베이징대에서 연설했다. [중앙포토]

국가 지도자가 외국을 방문할 때 자주 찾는 곳 중 하나가 그 나라 대학이다. 인재 양성의 요람인 대학에서의 강연은 그 나라 미래 세력을 상대로 펼치는 소프트 외교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함께 전사한 이순신 장군과 명(明)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을 언급했다.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을 겨냥해 한·중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6월 방중 시 칭화(淸華)대에서의 강연을 유창한 중국어로 시작해 중국인의 마음을 산 바 있다. 정상의 대학 방문은 정교하게 기획된 것이다.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은 과연 어느 대학을 찾아 자신의 견해를 전할까.

 최근 중국의 대학평가전문기관인 중국교우회망(校友會網)이 외국 정상이 중국의 어느 대학을 즐겨 찾는지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이제까지 232명의 외국 지도자가 52개의 중국 대학을 방문했다. 외국 정상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대학은 중국 내 대학평가에서 8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베이징(北京)대학으로 54명이 다녀갔다. 2위는 베이징대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 칭화대학으로 35명, 3위는 중국의 외교인재 양성소인 중국외교학원(22명)이 차지했다. 상하이(上海) 제일의 푸단(復旦)대학과 베이징의 인민(人民)대학은 각각 4, 5위를 기록했다.

 재미있는 건 국가별로 중국 대학 선호가 갈린다는 점이다. 미국은 칭화대 방문을 우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의 장막을 걷어내며 미·중 관계 회복의 물꼬를 튼 리처드 닉슨, 그리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등이 모두 칭화대를 찾아 연설했다. 미국이 칭화대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8개국 연합군은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외세 배격의 의화단(義和團) 운동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청(淸)으로부터 무려 4억5000만냥의 배상금을 받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경자(庚子)배상금이다. 미국은 그러나 이내 이 배상의 무리함을 깨닫고 배상 대신 청나라 학생의 미국유학 기금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유학을 위한 예비학교가 세워지는데 이게 바로 칭화대학의 전신 칭화학당이다.

 러시아 지도자는 베이징대 방문을 선호한다. 2002년 부시 미 대통령이 칭화대를 찾자 그 해 중국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은 베이징대학에서 연설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역시 베이징대에서 강연 외교를 펼쳤다. 베이징대학은 중국 대학 중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장 빨리 흡수한 곳이다. 중국에 공산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천두슈(陳獨秀)가 문과대학장으로, 또 리다자오(李大釗)가 도서관장으로 근무한 곳이 베이징대다. 마오쩌둥이 한때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베이징대가 항일(抗日)전쟁 시기 다른 대학과 함께 서남연합대학을 구성했을 때 소련으로부터 많은 사상을 받아들인 점이 러시아 지도자의 발걸음을 베이징대로 돌리게 하고 있다.

 독일 지도자는 상하이에 위치한 퉁지(同濟)대학을 즐겨 찾는다. 독일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1893년 한 독일인 의사가 진료소로 세운 ‘덕의공회(德醫公會)’가 시작이다. 1908년 ‘동제덕문의학당(同濟德文醫學堂)’으로 발전하는데 ‘동제(同濟)’는 독일인과 중국인이 한 배를 타고 세파를 헤쳐나가자는 동주공제(同舟共濟)에서 따온 말이다.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앙겔라 메르켈 등 독일 총리 대부분이 퉁지대학을 다녀갔다.

 한편 프랑스는 중국 중부에 있는 대학과의 교류에 집중하고 있다. 후베이(湖北)성 성도(省都) 우한(武漢)에 위치한 우한대학이 프랑스 지도자의 방문을 자주 받는 곳이다. 문화대혁명의 회오리가 끝난 뒤인 1980년 중국을 찾은 프랑스 지도자에게 중국은 상대적으로 문혁의 상처가 적었던 우한대학을 소개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 교육부 부장이 우한대학 출신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이후 프랑스는 우한대학과의 교류를 발판으로 우한에 영사관, 자동차생산공장 등을 잇따라 세운다. 프랑스의 대(對)중국 투자 3분의 1이 후베이성에 집중돼 있고, 프랑스에 유학하는 중국 학생 중엔 우한대학 출신이 가장 많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차이옌허우(蔡言厚) 중난(中南)대학 교수에 따르면 외국 지도자의 중국 대학 방문 선택엔 크게 네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첫 번째는 대학이 어느 도시에 위치하느냐다. 베이징은 중국의 정치중심, 상하이는 경제중심, 시안(西安)은 문화중심이다보니 이들 지역을 찾는 지도자가 많다. 두 번째는 대학의 특색이다. 중국외교학원, 중국과기(科技)대학, 윈난(云南)민족대학 등과 같이 대학이 양성하는 인재의 특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대학이 외국 지도자의 주목을 많이 받는다. 특히 개도국 지도자는 중국농업대학이나 다롄(大連)에 위치한 다롄해사(海事)대학 등 자신의 국가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학 방문을 선호한다.

 세 번째는 대학의 명성이다. 자신의 연설을 들은 학생들이 향후 중국의 명운을 짊어지고 갈 것이냐 여부가 외국 지도자의 중요 고려 사항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는 자연히 베이징대학이나 칭화대학 등 역사가 깊고 걸출한 졸업생을 많이 배출한 대학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G20 국가의 지도자는 중국 연해의 발전된 지역에 위치한 대학을 찾아 중국 경제발전에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네 번째는 특별한 인연이다. 독일과 퉁지대학의 연 등이 그런 케이스다.

 우리 지도자의 경우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으로 양분됐다. 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칭화대를 찾아 강연한 반면 김대중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베이징대학을 방문해 미래를 짊어진 중국의 학생들과 대화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치우친 감이 있다. 보폭을 좀 더 넓힐 필요가 있겠다.

유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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