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26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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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건발생에서부터 단교에 이르기까지 26일간 우리 정부와 국민은 조바심과 불안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버마는 시종 결벽증을 가진 사람처럼 우리 정부를 대하고 사건수사에 임했기 때문이다.
2명의 범인이 생포된 직후 우리정부는 이원경특사로하여금 버마정부에 수사협조 용의를 전하면서 사실상 공동조사를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버마측은 수사의 공정성및 수사결과에 대한 국제적 신뢰확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요구를 일축하고 단독수사를 고집했다.
한국측은 10월13일 조문사절로 온「우치트·라잉」버마외상에게 북괴와의 외교단절을 포함한 강력한 응징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버마측은 『수사결과를 보고 북한범행임이 드러나야 그럴수 있을것』이라며 끝내 확답을 않고 오히려 아웅산묘지가 성역이라는 이유로 한국측의 사전점검을 버마측이 거부했다는 한국신문들의 보도에 유감의 뜻을 표했다.
버마측은 우리의 지나친「관심」에 거부반응을 드러냈고 우리측 관계자는 답답하고 짜증스런 나날을 보내야했다.
10월12일, 버마에 파견된 한국측 조사단은 폭파에 사용된 장비·무기등이 북괴무장공비들이 사용한것과 동일하다는 판단을 전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공했지만 버마측은 결코 결론을 내리려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북괴소행임을 확신한 한국측은 버마측에 우리의 분석을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생포된 범인의 대면을 공식요청했다.
한국측은 북괴가 진상의 탄로를 우려, 범인들의 생명을 노릴 가능성에 대비, 이들의 신변보호를 버마당국에 요청하는한편 영·일은 버마와 가까운 우방들을 통해 조속한 수사결과 발표를 독려했다. 그러나 버마의 속성을 잘알고있는 우방들은 그런「압력」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지 모른다고 경계했다.
이같은 충고를 뒷받침이라도하듯 버마측은 사건수사를 앞질러 보도하는 한국언론에 항의를 제기하고 우리보도진의 입국거절은 물론 이미 가있던 일부 보도진마저 철수토록 조치했다.
10월17일, 버마정부는 체포된 범인들이 아웅산사건의 범인임을 확인하는 중간발표를 했으나 범인들을 막연히 「코리언」이라고만 표현했다. 아울러 버마측은 수사를 측면지원하러간 우리조사단의 축소를 요청했다. 사태의 향방을 가늠할수없는 불안을 자아내게 했다.
버마측은 수사진전 상황을 일체 알려주지않고 『확증을 잡기전에 발표할수 없다』며 『기다리라』고만 했다.
24일까지 한국측의 범인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작 『물, 주스, 아야…』라는 범인들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을뿐이다. 이테이프는 한국측을 더욱 긴장케했다.
북한에서는 주스를 「단물」또는 「즙」이라고 하지 주스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 25일 버마측은 외교단장등 몇몇 외교사절 입회하에 우리측에 범인면담을 허용했는데 범인들은 이름을 강철민 또는 강민철이라고 하면서 서울출신, 성북국교출신, 서울대학생이라고 횡설수설했다.
우리측은 과거 남파간첩들이 비슷한 수법을 쓴다는것을 알면서도 버마측이 이들의 진술을 믿을때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지않을수 없었다.
한국측은 이상왕외무부 제1차관보등 고위관계자를 비공식으로 파견, 범인들의 진술이 허위임을 알렸는데 버마측은 『범인의 자백을 유일한 증거로 삼지는 않겠다. 다른 증거도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측은 버마정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며『현재로선 기다리는것만이 최상의 정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0월31일 모처럼 좋은 소식이 나왔다. 송영직대사대리는 버마외무성으로부터 10월14일자로 그들의 북경주재 대사이며 북괴겸임대사인 「우·옹·신」을 소환, 축산어업차관으로 발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11월초 범인들이 실종된 현대건설 노무자라는 보도로 혼선을 빚기도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가 이번 사건조사에 버마의 독자성과 체면을 살려 그들 자신이 독자적 결론을 내릴수있도록 인내심있게 기다려보자는 전략을 세워 밀고나감으로써 버마의 진상조사결과에 대한 객관성과 공정성 및 신뢰성을 보증한것은 평가받을만 하다.
그러나 한 고위외교당국자가 4일 랭군에서 버마측의 조사발표및 대북한조치를 취하던 바로 그시간에도 버마의조처가 나오려면 이달 중순이후가 될것이라고 자신했을만큼 버마정부의 동정에 캄캄했던 점은 외무부로선 깊이 반성해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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