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차회담이 일본측의 제의로 무기휴회에 들어간 날은 53년7월24일이었다.
여기에서 여담이긴 하지만 기록의중요성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주중참사관으로 해외근무를 하는 동안 동경에서 열린 2, 3차회담을 정리하기 위해 당시의 회의록, 한일양국의 신문·잡지, 한일회담에 관련된 저서,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증언등을 다각도로 참고하고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1965년에펴낸 「한일회담백서」의 기록에서 조차 양측 수석대표를 잘못 열거하고있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한일회담에 관한 모든것을 해명한 정부발행의 백서는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선 이 백서에는 2차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를 의촌승장 일본외무차관이라고 기술해 나도 전회에 그렇게 썼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위해 일본의 녹도평화연구소가 편찬한「일본외교사」제28권을 읽다가 제3차회담을 결렬시키게한 구보따(구보전)망언을 한 장본인 구보전관일랑 외무성참여가 2차회담의 일본수석대표로 기록된 것을 보았다.
나는 속으로 의아한 느낌이 들어다시 우리측 문헌을 이것 저것 뒤져보았지만 한결같이 백서의 기술과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당시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김용식전외무장관에게 문의해보았다.
한일회담의 초기 l, 2, 3차 회담의 수석 또는 교체수석대표로 그에 관한 많은 기록과 자신의 메모를 가지고있는 김장관은 일본측 수석대표가 의촌차관이 아니라 구보전참여였음을 확인해 주었다.
김장관은 또다른 나의 의문을 밝혀주었다.
즉 당시 신문을 보면 양유찬주미대사가 제3차 한일회담에 업저버로 참여했다고 기록돼있는데 백서나 정부관계문헌은 우리측 수석대표로 돼있어 혼란을 안겨주었다.
김장관은 이같은 의문에 대해 정부기록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2차에 이어 김장관 자신이 3차회담에도 수석대표를 맡았다는 것이다. 당시 주일대표부 공사였던 김씨는 일본외무성에 우리측 대표명단을 직접 제출했으며 양대사의 수석대표설은 당시 사정을 잘못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양대사는 당시 유엔총회경과보고차 본국에 일시 귀국했다가 워싱턴으로 귀임도중 일본에 기착했는데 그때가 공교롭게도 제3차회담이 막 열리던 53년10월초였다는 것이다.
양대사는 마침 회담이 재개된 첫날이고 또 일본외무성 고위간부들도 예방할겸 겸사겸사 일본외무성을 방문,첫날 회의에는 업저버로 참석했다는것이 김장관의 설명이었다.
김장관의 말을 듣고보니 양대사가 수석대표였다면 회담이 시작된 7일만에 워싱턴에 귀임해 기자회견을 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의문이 해소됐다.
회담수석대표가 누구냐 하는것이 대세에 영향을 중대하게 미칠 것이라고는 물론 생각지 않는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사소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장황하게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조그마한 사실의 오기를 가볍게 보다가는 큰 것도 그르칠 수 있다는 뜻이고 더군다나 외교란 정치와 정확을 그 어느 분야보다 요구한다는 점에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한국휴전협정이 7월27일 조인됨에 따라 「클라크」연합군사령관이 설정했던 「클라크 라인」도 8월27일에 정지됐다.
일본어선들은 가을철 어획기를 놓칠세라, 또 방위선도 정지되자 대거 한국수역으로 몰려들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9월8일 0시를 기해 경비정을 평화선으로 진출시켰다.
우리 경비정은 회담휴회기간 2개월여에 일본어선 70여척을 나포해 일본측에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이에 일본측도 제네바한국문제토의를 관망할 여유가 없게됐고 평화선분쟁해결을 위해 다시 회담을 열지않을 수 없었다. 의촌외무차관은 9월24일 김용식주일공사에게 회담재개를 요청하는 각서를 수교했다.
김공사는 일본측의 제의에 따라 본국정부로부터 회담에 임하는 훈령을 받기위해 귀국해 이대통령과 26일 l시간에 걸쳐 요담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