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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시 한 줄]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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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어떤 사람이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고,

풍경을 바라보는 이는 누각에서

그 사람을 바라본다.

밝은 달은 그 사람의 창을 장식하고,

그 사람은 다른 이의 꿈을 장식한다.

- 변지림(1910~2000) ‘단장(斷章)’

중국 대륙의 풍미 깃든 연애시
내 마음 비추는 듯 애틋하여라

이 시 참 묘하다. 수묵화 한 폭을 연상케 하는 고졸하면서도 촉촉한 서정이 연애시를 넘어 애틋한 인생의 비장함을 풍긴다.

 변지림(볜즈린)은 ‘현대파’라 불리는 중국의 모더니스트 시인 겸 번역가다. 1990년 홍콩에서 그를 만났을 때 팔순이 넘었어도 단아한 서정 시인으로서 인상이 진했다. 이 시는 수천 년간 면면히 이어져온 중국 산수화가 서른 몇 자에 농축된 느낌이었다.

 ‘단장’은 변지림이 1930년대 베이징대 영문과에 다니던 시절에 만났던 명문가 재원 장충화(장충허)를 주제로 한 시다. 너무 담담한 마음이었기에 장충화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변지림이 자신을 좋아한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나도 최근에 와서야 알았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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