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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속 길재경이 망명객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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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길재경(吉在京.66세로 사망) 부부장이 미국 망명을 요청해 제3국에 머물고 있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오보인 것으로 드러나 그의 망명설이 해프닝으로 끝나게 됐다. 본지의 확인 결과 그가 3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吉의 망명 보도가 나온 것은 지난 17일 오전. 연합뉴스는 서울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吉부부장이 다른 두명과 함께 얼마 전 미국 망명을 요청해 현재 안전한 곳에 머물고 있다"며 "지난달 20일 헤로인 50kg을 싣고 가다 호주 당국에 나포된 북한 선박 봉수호 사건에 따른 처벌을 피해 망명한 것"이라고 전했다.

일부 신문과 방송도 이 보도를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고, 일본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자가 지난 2월 17일 남북 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취재차 방북했을 때 찍은 2백여장의 애국열사릉 묘 사진을 점검한 결과 吉은 이미 2000년 6월 7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생년월일은 1934년 10월 18일생으로 통일부가 지난해 발간한 '북한 주요 인물 자료집'에 나온 1924년생과도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방북 당시 애국열사릉에는 5백71기의 묘가 조성돼 있었다. 이곳에는 이종옥 전 부주석, 현준극 전 당 국제부장과 소설가 홍명희, 경제학자 백남운, 역사학자 김석형 등 북한의 고위 관료와 학자들의 묘가 있었다.

기자는 2시간여에 걸쳐 애국열사릉을 돌아보면서 관심이 가는 인물들의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여기에 吉이 포함된 것.

吉부부장은 80년대 들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측근으로 부상한 정통 외교관료로, 여러 차례 마약 밀매와 위조 달러 유통에 관련된 인물이다. 그는 스웨덴 대사 재직 중이던 76년 외교관의 신분을 이용한 마약밀매 혐의를 받아 스웨덴 당국으로부터 국외 퇴거처분을 받았고, 98년 4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교하게 위조된 미화 3만달러를 바꾸려다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추방돼 국내외 정보기관의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그동안 吉부부장이 당 중앙위원회 서기실 내에서 金위원장의 비밀자금을 모으는 '금고지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관측이 있었으나 이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평안남도 출신인 그는 김일성고급당학교를 나와 50년대 말 외무성에 들어간 후 외무성 국장, 스웨덴 대사를 거쳐 외교부(현 외무성) 부부장.당 국제부 부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승진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98년 9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에서 탈락한 이후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아 '와병설'이 나돌았다.

정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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