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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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곰태재 산등성이를 숨가쁘게 넘어서면 아스라이 아래로 올망졸망 예쁜 마을이 보인다.
집집에서 끓는 가마솥 쇠죽 냄새는 하얀 열기로 모락모락 피어올라 그 구수한 향내는 골짜기를 뒤덮는다.
선녀의 치마폭보다 예쁘게 채색된 낙엽과 각양각색의 바위들로 어우러진 두곡전을 끼고 아름드리 은행나무 밑을 지나노라면 누런 송아지는 엄마 젖을 빨고 반짝이는 자갈들은 흐르는 물에 노래를 싣는다.
징검다리 건너 싸리문 앞에 서면 찢겨진 문풍지 사이로 그림처럼 앉은 어머니-.
뒷간 돌아 대나무 숲의 곧은 대를 뽑아 내려 거친 손등으로 깎고 다듬어서 겨우내 식구들의 털옷을 엮으셨지.
할머니의 털실바지엔 무릎에 솜을 넣고, 줄줄이 여섯 남매의 꿈들을 수놓으셨다. 닮아서 무릎 뚫린 바지와 팔꿈치가 구멍난 웃도리는 훌훌 풀어 아름다운 색을 섞어 새로운 따사로움을 만드셨다.
이제 내 어머니가 하셨듯이 나도 싸늘한 바람을 맞을 채비를 해야겠다.
가을을 맞은 다락 속에서 미완성 작품이 되어 1년간 잊혀 진 아이의 코트를 우선 손질하도록 하자.
구겨져 엉킨 실꾸러미는 다시 주름을 펴고 윤기를 되찾도록 해야겠다.
어느해 겨울은 수출품뜨개질로 가계부를 도왔고, 또 어느해의 뜨개질은 마음 한자락 스산한 가슴을 따뜻이 메워주었다.
올해는 제일 먼저 파란가을 하늘색으로 얇은 조끼를 짜자. 시어머니의 주름진 칠순의 얼굴이 조금은 화사해 지시겠지.
1년 사이 많이도 자란 고만고만한 두 녀석을 세워놓고 팔을 재고 다리를 재며 한올 한올 정성으로 엮어 내리자.
황금색 소담스런 볕을 담고 물위를 날으는 갈매기도 그려 넣자.
내 어머니보다 더 멋진 화가가 되어 보아야겠다.
한 바늘씩 엮어 가는 뜨개질 속에 내 자신을 살찌우는 계절이 있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순 <부산시 북구 엄궁동 263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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