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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한계령 입춘설경

중앙일보

입력

 

지난 주 휴가였습니다. 영동지방에 눈 올 예정이라는 일기예보에 내쳐달렸습니다.
미리 가서 기다릴 요량이었습니다. 더러 눈이야 보고 살지만, 사람을 만나 사진 찍는 과정에 지나치는 풍경일 뿐이었습니다.
작정하고 눈 사진에 빠져 보리라 벼르고 별렀습니다.

운전 중에 핸드폰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메신저, 카카오톡 알림신호가 연신 울립니다.
소통 방법도 참 가지가지입니다. 그만큼 복잡하게 사는 탓이겠죠. 운전 중인데다 휴가니 애써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참지 못했습니다. 이미 스스로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 진 겁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하나같이 ‘입춘대길’하랍니다. 그러고 보니 입춘입니다.
다들 봄을 애타게 기다렸나 봅니다. 그래도 저는 입춘에 봄맞이가 아니라 눈 구경 갑니다.

양양, 바다가 보이는 창이 넓은 숙소를 골랐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함박눈입니다. 사진 찍기엔 아직 어둠이 짙습니다, 모로 누워 팔베개를 하고 발가락을 까불며 하릴없는 눈 구경, 꼭 한번 이리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카메라에 눈길이 갑니다. 머릿속에 그려왔던 이 여유로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진장이의 숙명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밤바다로 나섰습니다. 순식간 바닷물에 녹아들 눈송이는 어둔 밤바다를 향해 미친 듯 내달리고, 저는 눈을 좇아 강릉·대관령·대관령 옛길 너머 다시 강릉, 또 양양·속초를 거쳐 진부령, 되돌아 속초·양양을 거쳐 한계령으로 미친 듯 내달렸습니다. 한나절 새, 눈은 거의 다 녹아버렸습니다. 입춘의 봄기운은 한나절의 설경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계령이 마지막까지 버티며 눈을 품고 있으리란 기대를 했습니다.

오색을 거쳐 오르는 구비길, 가파른 고개를 돌 때마다 뵈는 풍경이 진경산수화입니다.
봄기운 버티며 눈을 품은 꼿꼿한 기상이 과연 한계령답습니다. 허나 차를 세울 수 없습니다.
미끄러운 길인데다 차들이 줄지어 뒤 따르고 있습니다. 풍경 감상에 느릿느릿 올랐더니 어느새 차량행렬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딱히 비켜줄 공간도 없습니다. 사진 촬영은커녕 뒤 따르는 차들에 밀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차가 애물단지입니다. 차라리 차를 버리고 싶습니다.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고 그렇게 꾸역꾸역 한계령휴게소에 올랐습니다.
내려다보니 발아래 안개가 자욱합니다. 올라온 길조차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니 눈을 품은 남설악의 진경은 언감생심입니다.
아쉽습니다. 그나마 서북주릉을 휘돌아 온 바람이 몰고 다니는 안개의 기묘한 꿈틀거림이 위안입니다.
정덕수 시인의 시 ‘한계령에서1’이 머리에 스칩니다. 눈 앞 풍경과 시의 한 구절이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발아래 휘도는 안개구름에 한참을 취해 있는 데 누군가 소리칩니다.
“저 봉우리 봐봐.” 자욱한 안개 속에서 두어 개 봉우리가 희미하게 비칩니다.
이윽고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봉우리들. 이른바 떠도는 바람이 이 산 저 산 안개구름을 몰고 다니며 자아내는 남설악의 고고한 자태입니다.
예서제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렇게 고대했던 한계령의 ‘입춘설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원 풀었으니 이젠 휴가를 예서 끝냅니다. 한계령을 품고 돌아갑니다.
‘한계령에서1’의 한 구절을 되뇝니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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