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 국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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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후하인」요르단국왕은 한때 서방신문들로부터 「중동의 햄린」이라는 닉네임을 선물받았었다.
「햄릿」은 「셰익스피어」비극의 주인공.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끝없이 망설이기만 해야했던 고뇌의 왕자다.
「후세인」에게도 「햄릿」 못지않은 곤란한 순간이 있었다.
1970년 2월. 그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게릴라와 타협하느냐, 아니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과 손을 잡느냐 하는 기로에 섰다.
「햄릿」의 고뇌가운데서 그는 다섯번의 변신을 해야했다.
10일엔 요르단영내에서 아랍 게릴라활동 금지령을 내렸다. 이스라엘과 손잡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게릴라의 반발로 12일엔 그 명령을 취소했다. 그런 「햄릿」적 방황끝에 22일 그는 최종결단을 내렸다. 「아라파트」의 아랍게릴라가 요르단에서 활동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인구의 6할이 팔레스타인인 그나라에서 그들의 활동인정은 자신에겐 심각한 위협이 된다.
하지만 그 결정은 현명했던 것 같다. 그의 건재와 중요도 상승이 모든 걸 설명해준다.
요르단은 9만평방km 국토에 인구가 3백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하지만 지금 요르단은 「중동의 눈」이 되고 「후세인」국왕은 중동협상의 새기수가 되고 있다. 그의 인간됨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가계는 아랍의 성지「마호메트」의 후손으로 37대를 이어온 하시미테왕가다.
조부왕이 피살되는 현장에서 16살의「후세인」도 저격을 받았다. 그땐 가슴의 훈장만 떨어졌지만.
17살때 왕위에 오른뒤 거의 20번의 암살음모를 물리치며 미소를 잃지않고 있다.
다부지고 무뚝뚝하나 굳센 사나이의 면모가 뚜렷하다.
군부반란때는 병사들에게 『나를 쏘라』고 가슴을. 내밀었다는 일화도 남겼다.
세계의 지도자중 손꼽히는 활동가요 스포츠맨이다.
사냥과 말타기, 스쿠버 다이빙과 심해낚시가 그의 취미생활이다.
요르단에 최초로 수상스키와 요트를 도입, 보급했고 카 레이서로도 뛰어났다.
은색의 포슈911을 몰고 요르단의 스포츠카 경기에서 몇차례 우승한 일도 있다.
스피드광인 그는 모터 사이클은 물론 제트기를 몰고 음속돌파를 즐기기도 한다.
59년엔 애 기를 스스로 몰고 비행하다가 시리아공군 미그기들의 기습을 당한 적도 있다.
그는 어쩌면 숙명적인 모험가다. 중동국가중엔 유일하게 석유가 나지않는 가난한 나라를 이끌고 용케도「중동의 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지금 한국을 방문해서 아시아의 동과 서를 잇는 역사적인 과업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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