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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보다 집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휴가차 떠난 여행지에서 아무리 근사한 호텔에 묵더라도 집에 돌아와 소파에 걸터앉으면 입버릇처럼 ‘아, 역시 집이 최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1 보조 주방의 벽을 터서 훨씬 넓어진 주방과 다이닝 공간. 벽에 몰딩 장식을 붙여 클래식하게 연출했다. 2 클래식한 분위기의 주방 너머로 모던한 거실이 보인다.

함께하지만 독립적인 공간일 것

우리는 집을 통해 한 가족의 삶을 만난다. 집은 가족이 공유하는 삶의 방식, 그들의 문화, 가치관을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삶에 개입하는 디자이너의 어깨는 더욱 무겁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지극히 사적인 장소를 난생처음 보는 이에게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만큼 디자이너를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최은규·정유선 부부에게는 에프알디자인의 최선희 대표가 그런 존재였다.

금융투자업에 종사하는 최은규·정유선 부부는 이사를 계획하고 공사의 흔적이 전혀 없는, 그래서 전체를 다 뜯어고쳐도 아깝지 않을 집을 찾아 나섰다. 부부가 고른 집은 트렌디한 번화가에 인접한 대형 주거단지여서 생활의 편의성이 좋으면서도 부부의 회사와 가까웠고, 향후 투자성도 괜찮은 아파트였다.

짬을 내기 어려운 맞벌이 부부인지라 부부가 원하는 바를 짧게 전달하면 알아서 잘 챙기고 배려해줄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찾던 중에 에프알디자인의 이전 작업을 보게 됐고, 이곳이야말로 개인의 취향을 집에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어 개조를 의뢰하게 되었다.

부부에게는 집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아내 정유선 씨는 집은 무조건 안락해야 한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퇴근 후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집에 있을 때는 잠깐이라도 최대한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내고 싶어요. 휴가로 떠난 여행에서 아무리 좋은 호텔에 묵어도 며칠 지나면 집이 최고라며 돌아오잖아요. 그만큼 집은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부부는 어린 아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살피는 입주 가사 도우미와 살다 보니 가족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요청도 덧붙였다. 최선희 대표는 맞벌이 부부가 흔히 경험하는 문제를 중문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중문 너머로는 안방과 서재가 위치한다.

욕실이 딸린 안방은 부부의 드레싱 룸과 침실로 나눠서 사용하며, 안방 건너편의 방은 서재와 AV 룸을 겸한 패밀리 룸으로 쓴다. 금요일을 패밀리 데이로 정해 저녁을 함께 먹고 보드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등 가족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세 사람은 중문 아이디어 덕분에 아늑하고 독립적인 공간을 얻었다.

1 남편과 아내의 취향이 적절히 섞인 거실. 남편은 모던한 스타일을 선호하고 아내는 네이비 컬러와 캐멀 컬러의 조합을 좋아한다. 폴트로나 프라우의 가죽 소파는 이탈리아에서 직구로 구입한 것이다.

2 TV는 AV 룸을 겸하는 서재에 설치했고 거실에서는 주로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회색과 겨자색의 수납장은 제작한 것.

3 정유선 씨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 다음 액자로 만들어 거실 한쪽 벽을 꾸몄다.

4 유리를 삽입한 블루 컬러의 중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부부의 침실이, 오른쪽에는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가족 모두의 요구를 수용하는 집

에프알디자인의 최선희 대표는 집을 개조하기 전 가능하면 클라이언트를 자주, 많이 만난다. 디자이너가 잘 알지 못하는 한 가족의 라이프스타일과 습관, 생활 패턴, 취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최은규·정유선 부부처럼 부부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다른 경우에는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물을 위해서 이를 자연스럽게 절충시키는 과정이 꽤 오래 걸린다. 아내 정유선 씨가 클래식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면, 남편 최은규 씨는 상대적으로 실용적이면서 모던한 집을 선호해 185m²의 오래된 아파트를 전체적으로 모던하면서 클래식한 요소가 있는 집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전체 공사 기간은 한 달 반 정도가 소요됐다. 구조 변경은 보조 주방의 벽을 터서 주방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이 전부지만, 입주 후 오랜 시간 보수를 하지 않은 집이라 기본 공사에 시간이 꽤 걸렸다.

주말에는 지인을 초대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넓은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넉넉한 다이닝 공간을 주방에 확보했고, 클래식한 몰딩으로 장식하는 대신 모던한 그레이 컬러로 벽을 칠해 거실과 주방이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배려했다.

개수대와 수전은 주방 코너로 옮기고 블랙 아일랜드 테이블을 설치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수납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특징. 독특한 것은 주방 상부장과 하부장 사이에 타일이 아닌 식물 패턴의 벽지를 발라 창밖으로 초록 나무가 보이는 것처럼 의도한 점이다.

정유선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집에서 푸른 숲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죠. 그런 생각으로 다른 방의 벽지를 고르는데 콜앤선의 나뭇잎 패턴 벽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부엌에 긴 창을 내고 그 밖으로 나무들이 보이는 것처럼 콜앤선의 벽지를 바르면 어떨까 에프알디자인에 말씀드렸죠. 최선희 대표님은 벽지를 시공하고 그 위에 유리를 덧대서 제 생각을 실현해주셨어요.”

디자인 가구에도 관심이 많은 정유선 씨는 해외 직구를 통해 폴트로나 프라우의 소파를 구입했다. “거실의 폴트로나 프라우와 카르텔 소파는 각각 골랐는데, 두 디자인 모두 피에로 리소니의 작품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 푹신한 게 마음에 들었고요. 특히 이탈리아에서 직구로 구매한 폴트로나 프라우 소파는 거의 넉 달을 기다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가죽이 워낙 부드럽고 색이 연해서 오염에 약하다고 남편이 꾸준히 불평하지만, 다시 고르라고 해도 연한 캐멀색을 고를 것 같네요.”

거실의 모던한 분위기는 남편의 취향에 맞췄지만, 소파의 캐멀 컬러와 벽의 네이비 컬러는 아내가 좋아하는 컬러 조합으로 두 사람의 취향이 절묘하게 섞인 것이 흥미롭다.

각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혼합되면서 집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족 고유의 스타일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삶이 곧 가족의 역사가 되는 집은 더욱더 휴식과 재충전의 기능에 충실해야 하며,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동시에 각각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아야 하는 공간이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1, 2 블랙 아일랜드 테이블을 설치한 주방 공간. 개수대는 코너로 옮겼고, 상부장과 하부장 사이에 콜앤선의 초록 나뭇잎 패턴의 벽지를 발라 싱그러운 느낌을 주었다.

3 AV 룸을 겸하는 서재이자 가족실이다. 부부의 책은 만화방처럼 슬라이딩 책장을 만들어 모두 수납했고, 게임을 하거나 현성이의 숙제를 봐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커다란 테이블을 놓았다.

4 대로변의 소음과 이른 아침의 빛을 차단하는 루버 셔터를 달아 침실이 더욱 아늑해졌다. 침실에는 마르셀 반더스가 디자인한 펜던트 조명을 달았는데, 겉에서는 밋밋해 보이지만 내부를 보면 아주 관능적이면서 화려한 패턴이 새겨져 있다.

5 침대 헤드보드 면의 벽 뒤로 부부의 드레싱 룸이 있다.

기획=정수윤(프리랜서), 사진=김잔듸(516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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