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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개월→97개월, 패스트머니가 바꾸는 부자 탄생 공식

중앙일보

입력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습한 1941년, 11살 소년 워런 버핏은 생애 첫 주식투자를 했다. 누나와 함께 시티즈서비스의 우선주를 주당 38.25달러에 각각 3주씩 샀다. 주가는 27달러까지 떨어졌고 40달러를 회복하자 바로 팔아치웠다. 몇 달 뒤 이 주식은 202달러까지 올랐다. 첫 투자는 간신히 낙제를 면한 셈이었다.

74년이 흘렀다. 워런 버핏(85) 버크셔해서웨이 최고경영자(CEO)는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그는 '투자의 귀재'로 불린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5일 현재 버핏의 재산은 722억 달러(약 79조원)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83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버핏의 재산 중 627억 달러는 50세 이후 벌어들인 것”이라고 보도했다. 환갑을 넘겨 늘어난 재산만 600억 달러다. 돈을 불린 기간으로만 따지면 버핏은 ‘대기만성형 갑부’에 가깝다. 이를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분석도 나왔다. 블룸버그통신이 전세계 주요 억만장자의 재산이 200억 달러로 늘어나는 데 걸린 시간을 분석한 결과다.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20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갑부는 전세계에 38명에 불과하다.

버핏의 재산은 66세가 되던 97년 5월에 200억 달러를 넘었다. 회사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69년 6월을 기준으로 잡고 총 335개월(27년11개월)이 걸렸다. 래리 앨리슨(71) 오라클 CEO와 빌 게이츠(60)가 200억 달러의 자산가가 될 때까지는 각각 269개월(22년5개월)과 259개월(21년7개월)이 소요됐다. 이때만 해도 수퍼 리치가 태어나려면 보통 20년 이상의 회임 기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부자의 탄생'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2세대 수퍼 리치들은 단기간에 ‘자산 200억 달러’ 고지를 밟았다. 제프 베조스(51) 아마존 CEO(196개월)와 마윈(馬雲·51) 알리바바 회장(187개월), 세르게이 브린(42)과 래리 페이지(42) 구글 창업자(106개월) 등이 기록을 앞당겼다. 신기록은 마크 저커버그(31) 페이스북 CEO가 세웠다. 200억 달러의 자산을 만드는 데 97개월(8년1개월)이면 충분했다.

세계 수퍼리치를 분석한 웰스X는 “세계화와 통신기술의 발전, 규제 완화 등의 영향으로 몇십 년 동안 모아야 했던 재산을 몇 년 안에 불릴 수 있게 됐다. 가장 눈에 띄는 사례가 30살에 300억 달러의 재산을 손에 쥔 저커버그”라고 분석했다.

버핏의 335개월을 저커버그의 97개월로 줄인 일등공신은 기업공개(IPO)다. 저커버그와 마윈 모두 IPO로 일약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IPO와 인수합병(M&A)이 새로운 억만장자를 탄생시키는 주요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IPO나 M&A는 기업의 창업자나 기존 주주에게는 ‘유동성 잔치’다. 회사 가치와 지분 가치 등 몸값이 오르며 거액을 손을 쥘 수 있어서다. 루돌프 힐퍼딩이 『금융자본론』에서 주장한 ‘창업자 이득’이다. 산업 자본이 주식 자본으로 전환될 때 발생하는 이익이 창업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상장이 ‘잭팟’이 된 것은 시장의 자금 동원력이 커진 덕이 크다. 일반 대중이 주식 시장에 뛰어들고 간접투자 상품인 펀드의 규모도 커졌다. 금융시장 개방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 투자자가 한 곳을 향해 뛸 수 있게 됐다. IPO를 통해 창업자나 기존 주주가 돈방석에 앉을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실제로 유동성 잔치는 90년대 후반 닷컴 버블과 2000년대 부동산 열풍 때 정점을 찍었다. 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 전 뮌스터대 교수는 『0.1% 억만장자 제국』에서 “정보통신 기술이 세계 금융시장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국경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졌고 무주공산이 된 지구 위로 이제 전자상거래가 돌진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자본의 ‘스노우볼 효과(Snowball Effect)’도 부자의 탄생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 요인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자본수익률)가 빨라지면서 부자의 재산은 과거에 비해 더 빠르게 증식하고 있다. 미국경제연구소(NBER)가 소득 증가율을 분석해 발표한 최근 보고서는 이를 보여준다. 미국의 소득 상위 1% 부자들이 25세에서 55세가 될 때까지 총 소득 증가율은 1500%였다. 반면 평균 미국인의 이 기간 소득 증가율은 38%에 그쳤다. 보고서를 작성한 파티 구베넨 미네소타대 교수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일반 근로자의 소득이 매년 1% 늘었다면, 상위 1%에 속하는 부자의 소득증가율은 매년 9%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어린 부자의 탄생은 '상속의 시대'가 도래하며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웰스X와 NFP는 최근 ‘가계 자산 이전 보고서’에서 “앞으로 30년간 사상 최대 규모로 부의 대물림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30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보유한 수퍼리치 중 50대 이상이 전체의 75%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부의 이전이 급격하게 이뤄지며 저커버그 같은 자수성가형 부자뿐만 아니라 패리스 힐튼과 같은 상속 부자가 부상할 것이란 분석이다.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지적한 ‘세습 자본주의’가 고착화하는 모습이다.

때문에 '부자의 탄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부자들의 나이가 1~2세대 이전보다 젊어지고, 자본 소득의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기업을 일궈낸 창업 부자보다는 상속받은 부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폴 크루그먼도 “오늘날 수퍼 부자의 대부분은 자신의 돈을 금융부문에서 만들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기업을 일으킨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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