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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도깨비 그리고 반기업 정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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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림을 좋아하던 제나라 임금이 화공에게 물었다.

"어떤 그림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가?"

화공 왈, "개나 말 같은 게 가장 어렵습니다."

또 임금이 물었다.

"무슨 그림이 가장 그리기 쉬운고?"

"귀신이나 도깨비입니다."

의아해진 임금이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화공은 이렇게 답했다.

"개나 말은 아침 저녁으로 늘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다 잘 알기 때문에 가장 그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형체가 없어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가장 그리기 쉽습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귀매최이(鬼魅最易)다. '귀신(鬼)과 도깨비(魅)가 가장(最) 그리기 쉽다(易)'는 의미다.

요즘 장안의 화제는 단연 강정구 교수 사건이다. 한국전쟁.북한.미국 등은 모두 사람들 눈에 잘 보이는 것들이라 '그림 그리기(해법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강 교수 주장은 처음부터 '귀신 얘기'로 치부하는 게 옳았을 성싶다. 우리 역량과 수준으로 미뤄 얼마든지 무시해도 될 사안이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소란은 공연한 낭비 같기만 하다.

재벌과 오너에 대한 최근의 요란도 그렇다. 우리 일상 생활은 재벌과 그들이 만든 제품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누구나 재벌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때론 긍정적이다. 외국에서 이들 기업의 입광고판을 보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재벌 기업에 취직하겠다는 젊은이들도 줄을 서 있다.

부정적인 경우도 많다. 오너에 대해선 특히 그렇다. 소설과 영화 등에선 '악의 화신'쯤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 이 같은 반(反)기업 정서, 반오너 정서, 반부자 정서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고, 부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나라 경제가 결딴날 것이란 우려다.

맞는 얘기다. 재벌을 미워하고, 부자를 증오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그렇다고 이를 '도깨비 얘기'로 치부할 순 없다. 반기업 정서는 실체가 있는 것이라서다. 이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기가 쉽지 않다. 정서와 의식은 면면히 내려온 전통과 문화, 관행, 제도 등의 산물이라서다. 다 같이 힘을 모아도 세월이 흘러야만 바뀌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꼭 100년 전인 1905년의 미국 사회는 최대 기업인이었던 록펠러 때문에 매우 떠들썩했다. 석유왕인 그가 교회에 거금을 기부했지만 사람들은 '악랄한 방법으로 얻어진 더러운 돈'이라며 교회에 거절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엔 반기업 정서가 드물다. 그 근저엔 '기업인'들의 희생정신이 있어서다. 록펠러는 종교와 건강, 교육, 미술 등 자선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철강왕 카네기와 화학왕 듀폰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미국 재계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미 정부가 앞장서 상속세를 감면하겠다고 해도 빌 게이츠의 아버지 등이 앞장서 반대할 정도다. 천재 골프 소녀 미셸 위도 얼마 전 프로 전향을 발표하면서 카트리나 참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서슴없이 50만 달러를 내놓았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식 교육을 받고 미국적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업은 잭 웰치 전 GE 회장의 말처럼 이익을 내는 것이 최대의 사회 공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위대한 기업가는 '플러스 알파'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흔들리는 사회의 뿌리를 바로 세우는 데 기부해야 한다. 윤리경영이든 사회 책임경영이든 그 이름이야 어떻든 말이다. 기업 돈이 아닌, 기업인 자신의 돈이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김영욱 경제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