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571m 빌딩, 싱크홀에 놀란 민심 설득이 열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개발과 관련해 서울시 내부에서 속도조절론이 나오고 있다. 이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매입한 현대차그룹이 국내 최고층(지상 115층·높이 571m) 빌딩 건설 계획을 담은 한전 부지 개발 제안서를 지난달 30일 서울시에 제출한 직후부터다.

 제안서 제출은 지난해 9월 부지 매입 이후 4개월여 만에 이뤄졌다. 서울시와 현대차는 "개발 구상을 담은 초안일 뿐”이라고 하지만 속도가 빠르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서울시가 제2롯데월드(123층·555m) 문제로 홍역을 치른 것을 들어 “제2롯데월드의 복기(復棋)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경제활성화를 위해 ‘패스트 트랙(Fast Track)’을 강조하던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이다.

 지난해 4월 박원순 서울시장은 코엑스~한전 부지~잠실종합운동장을 잇는 72만㎡에 이르는 ‘서울 동남권 국제교류 복합지구(MICE)’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한전 부지는 박 시장 구상의 주춧돌이다. 마침 기획재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한전 부지 개발을 적극 지원한다고 발표한 터라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제2롯데월드도 건축 단계에선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개장 직전엔 싱크홀(도로 침하)과 석촌호수 수위 논란으로, 개장 후에는 각종 안전 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영업 인허가권을 가진 서울시는 일이 터질 때마다 관리·감독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상주인구 68만명에 중산층 밀집지역 송파구의 민심도 흔들렸다. 집 주소나 상호 앞에 ‘석촌호수’를 지우는 사례가 늘면서 파장을 낳았다. 제2롯데월드의 시네마와 아쿠아리움이 안전 문제로 문을 닫은 지 3일로 49일째다. 익명을 요구한 롯데 관계자는 “우리는 정부와 공군·서울시의 동의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시민의 동의와 응원이 아닐까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8월 잠실 석촌호수 인근 도로에 발생한 싱크홀(도로침하)의 모습. 오른쪽 그림은 서울시가 추진 중인 `동남권 국제교류 복합지구(MICE)`의 구상도. [중앙포토]

 서울시 관계자는 “제2롯데월드 이후 초고층 빌딩은 정치·사회적 문제가 됐다”며 “제2롯데월드와 불과 3.5㎞ 떨어진 곳에 현대차가 571m 빌딩을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서울시도 경제효과만 일방적으로 얘기하긴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한전 부지 개발의 난제는 기술적 부분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고려대 여영호(건축학) 교수는 “MICE는 강남권 전체의 문제고 이는 교통과 안전뿐 아니라 강남·강북간 격차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고 말했다.

 기업과 지자체가 부담해야 할 비용도 예상보다 늘어날 수 있다. 롯데는 애초에 도로 확장 등을 위해 810억원을 내놓기로 했으나 지난해 8월 390억원이 추가된 수정안(1200억원)을 내놨다. 빌딩의 구조적 문제를 낙관했던 서울시도 어려움을 겪었다. 지반 침하로 인한 우려가 커지자 서울시는 시내 전체의 노후 하수관을 교체하는 계획을 내놔야 했다.

 관동대 박창근(토목학) 교수는 “법과 조례를 바꿔서라도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전환적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며 합의의 도구로 ‘공공 기여’를 제안했다. 서울시와 현대차간에 이견이 있지만 공공 기여 규모는 1조5000억원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행 규정상 공공 기여금은 사업이 진행되는 지구에서만 쓰여야 한다. 박 교수는 “규정을 바꿔서라도 돈의 일부를 떼어 강북 개발을 위해 쓰고 이 사업이 사회 전체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메시지를 던질 필요가 있다”며 “이 과정에서 정말 필요한 게 정치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강인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