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교수 파문 어떻게 볼 것인가] 강 교수, 진보학계서도 주목 못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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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진보학계 연합기구인 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사정에 밝은 성균관대 김동택 교수는 "강 교수는 1980년대를 달궜던 진보학계 논쟁의 주류에서 한발 물러서서 활동해온 학자"라고 설명했다. 이념적으로는 NL(친북 주사파 계열의 민족해방론)계열 쪽이라서 PD(사회주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민중해방론)가 주축인 진보학계에서 강 교수가 자기 목소리를 키우기 어려웠다.

◆ 강 교수 발언의 학문적 맥락=학문에 국한해 보자면 현재 학계 내부에서 그에 대한 지지 표명이 거의 없다. 강 교수의 친북 발언은 최근 10여 년 사이에 크게 썰물 현상을 보이는 수정주의(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사를 스탈린의 세계 지배 음모로 보는 시각을 부정하려는 학설)를 새로운 내용 없이 동어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개별적 사실의 내용이나 맥락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주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간 강 교수 발언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떠들썩한 반응은 정서적인 과잉 대응, 소모적 논쟁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강 교수 파문은 우연한 돌출적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의 주장이 학계 내부의 토론 과정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마광수 교수처럼 스타 기질의 특정한 학자가 소신 발언을 하다 부침을 겪는 일이라는 맥락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인터넷 환경이 일반화함에 따라 개인의 의견과 취향이 쉽게 눈길을 끌 수 있게 된 결과일 뿐이라는 취지다. 강 교수는 자신의 저작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통일시대의 북한학' 등에서 분단의 책임이 미국 쪽에 있다는 반미적 주장을 지속적으로 펴왔으나 학문적인 영향력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주의 주장은 강하지만, 분석과 논거 제시에는 취약하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2001년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열린 주체사상 토론회에서 "북한의 건설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주체사상의 자구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면서 전체적 맥락의 주체사상 해석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 등으로 업적을 인정받아온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의 박명림 교수는 "1차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는 현대사 관련 전문학자들 사이에서 강 교수의 저작이나 논문이 인용된 적이 거의 없다. 진지하게 토론이 되는 사례 역시 드물다. 즉 강 교수의 글은 학문적 세계와는 거리가 멀며,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인터넷 등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던지는 것일 뿐이라고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 '6월 항쟁' 이후 진화해온 진보학계=학문적 성취나 평가와 상관없이 이념 계보상으로 보자면 강정구 교수는 좌파 계열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2005 학계의 이념 지형도'(표)상에서 김대중 정부시절 색깔론 논란을 빚었던 최장집 교수도 중도 좌파로 분류된다. 진보학계의 좌장인 백낙청 교수도 진보적 민족주의로 분류돼 거의 중도 좌파에 가깝다.

학계 내부의 진보주의는 80년대 중반 6월 항쟁을 전환기로 삼아 진화한다. 민주인가, 비민주인가의 기존 도식이 무너지면서 서구의 포스트(후기) 마르크시즘까지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폭제가 한국 사회의 현단계를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문제를 둘러싼 '사회 구성체 논쟁'. 이때 분단 이후 된서리를 맞았던 정통 마르크시즘 정치경제학까지 복원됐다.

김호기 교수는 이를 "200년 역사를 가진 서구 좌파이론을 나름대로 소화해내려는 노력이자 학문적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 이후 불거져 나오는 이념논쟁, 색깔론이란 사회 발전의 한 양상이자 문화 다양성의 표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주류 진보학계의 영향력은 90년대 직후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대신 환경운동연합(93년 발족), 참여연대(94년 발족), 민주노총(95년 발족), 민주노동당(2000년 출범) 등 시민단체와 정치 부문 쪽으로 힘이 옮아갔다. 오늘날 진보 학계는 정통 마르크시즘, 신좌파에서 진보적 시민사회론, 진보적 민족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좌파 이론이 자기 목소리를 유지하며 '학문 이념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뒤늦은 진보학문의 형성이 다분히 한국적인 지체 현상이라는 점이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불구화됐던 학문적 자유가 뒤늦게 확보됐을 뿐, 이제 세계화의 흐름과 정보화의 대세 속에 재정립의 요구를 받고 있다. 이런 새 흐름을 도외시할 경우 '시대착오'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많은 학자의 우려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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