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식·한문투의 발표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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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계속되는 가마솥더위에 전국이 나른해진 일요일 하오 느닷없는 적기공습경보가 국민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것이 엊그제다.
아찔했던 상황은 다행히 중공기의 귀순으로 밝혀져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지만 「숨가빴던 17분」을 돌이켜보면서 적잖은 반성들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부지런히 연습을 쌓았고 또 그 때문에 재빨리 질서있게 대피하는 성과를 보여준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실제상황」이 되자 허점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침착하게 국민들을 이끌어야할 당국이 국민들에 앞서 흥분을 했고 중공기 1대가 무장없이 들어왔는데도 경기·인천·서울에 차례로 「공습경보」가 내려져 외신은 이 지역이 적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급전을 쳐대기까지 했다.
대피는 재빨랐는데 그 다음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막연했다. 차량통행이 일체 끊기는 바람에 「요원」들이 발이 묶이는 모순도 확인됐다.
가정을 해보자.
중공기가 영공에 들어왔을 때 경보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기 1대가 우리 영공에 나타났읍니다』고 알려주고 중공기임이 확인됐을 때 『비행기는 중공공군기입니다. 무장은 없읍니다』 『귀순의사를 표시했읍니다』 등으로 그때그때 구체적인 상황을 알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 「실제훈련」을 계기로 드러난 문제점들을 당국은 철저히 보완하리라고 한다.
다시 쓸데없는 혼란이나 불안은 없도록 완벽한 민방위체제가 갖춰지기 바란다.
이 보완은 절차와 형식에서 모두 가장 적절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보완에 덧붇일 것은 방송이고 발표고 쉬운 우리말로 하자는 것이다.
이번 방송과 발표에서 국민들을 어리둥절, 답답하게 한 것은 귀에 선 용어였다.
『아공군기가…』 운운 등 3·1독립선언서에서나 볼 수 있는 구투의 용어와 『미식별기…』 등의 한자용어가 귀에 거슬렸다. 우습기도 했다.
왜식·한문투의 낡은 용어들이 그동안의 꾸준한 정화작업에도 관청의 행정 등 각부문에 아직 찌꺼기로 남아 있다.
무심코 내뱉는 『기히…』 『필히』 『금후』 『차제』 『기필코…』 『당부』 『금번』 등에서부터 『유비무환』 『소주밀직』의 구호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대한제국시절을 사는 용어들이 수두룩하다.
『우리 공군기가…』 『공습경보를 내립니다』 『공습경보를 풉니다』 『이번에…』 『우리 부에서는』 얼마든지 알기 쉬운 우리말로 할 수 있고, 또 해야 마땅한 용어들을 굳이 알아듣기 어렵게 쓰는 것은 생각이 모자란 것인가, 성의가 모자란 것인가.
더욱이 민방위방송같은 중대한 발표는 3살 먹은 꼬마서부터 까막눈 할머니들도 금세 알아들을 쉬운 말로 해야할 것이다.
우리말 쓰기는 생활의 필요일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며 스스로를 지키고 높여가야할 겨레의 이상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의식의 민주화와 짝하는 것이다. <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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