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리더십] 6. 리더십의 요체 爲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왕자 시절 세종은 책을 너무 읽어 병이 날 정도로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이는 조선 최고의 현군 세종의 국가경영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기반이었다. 그림은 김학수작 ‘왕자 시절 독서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정윤재 세종국가경영 연구소 소장

오늘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말하듯 조선의 왕이나 사대부들은 위민(爲民)을 강조했다. 문제는 '백성을 위한다'는 그 많은 말.말.말들이 얼마나 정책으로 구현되는가에 있었다. 세종의 국가경영에서 위민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수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세종 리더십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종은 상당한 균형 감각을 가지고 국가를 경영했다. 가령 세법(稅法) 개정 과정에서 그는 신료와 일반 백성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여론을 골고루 들었다. 왕조시대였음에도 정책 수행에 앞서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공론 정치를 선보였던 것이다. 형을 집행하거나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는 사정(私情)과 공의(公義)의 조화를 지향했다. 그리고 한글 창제 과정에서 보듯 세종은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와 내부적 국력 신장이라는 두 가치의 묘합을 추구했다.

둘째 세종은 예방적 조치를 많이 취했다. 백성들의 불만이 적극적으로 표출되기 전에 필요한 정책을 미리미리 마련하고 주변을 설득해 나갔다. 우마(牛馬) 취급을 받던 노비들에게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세종 리더십의 본질이 인간성의 발현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각종 과학기구의 발명, 그리고 백성의 계몽에 필요한 고전의 편찬 사업 등은 아름다운 풍속이 꽃피는 문명국가로 나아가는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었다.

셋째 세종은 깊이 생각하고 여러 번 의논하는 '숙의(熟議) 정치'를 실천했다. 세밀한 현황 조사,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갈등을 관리해 간 사례는 파저강 토벌, 고약해 사건, 약노 사건 등 무수히 많다.

이 같은 세종의 리더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왕위 계승 과정을 통해 세종은 '택현'(擇賢.인재 발굴)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절감했다. 아버지 태종은 당초 적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끝까지 양녕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양녕이 안 되면 양녕의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결국 왕위 계승자를 세종으로 결정한 뒤 태종은 통곡했다고 한다. 세종의 능력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적장자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종에겐 훌륭한 리더십 교육이 되었다.

아버지 태종의 리더십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다. 태종이 왕조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외척과 아들 세종의 외척까지 매몰차게 멸문시키는 것을 보고 정치와 권력의 냉혹함을 체험한다.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있었던 황희를 채용하고, 다른 신하들의 질시와 반대에 굴하지 않고 허조를 중용했던 태종의 용인술도 배웠다. 또 태종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강상인을 냉정하게 처단하는 것을 보고, 군주로서 계통에 따라 신료들의 보고를 철저하게 받고 토론하는 요령도 체득했다.

무엇보다 세종 리더십의 기반인 독서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폐세자된 양녕을 대신해 2개월 만에 왕위에 올랐다. 세자 수업은 2개월뿐이었지만, 그에 앞서 수많은 경전을 읽으며 왕자 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효경' '자치통감강목' 등이 기본 교재였다. 세종의 건강을 걱정해 태종이 환관을 시켜 서책을 감춘 적이 있는데, 세종은 방안에 남아있던 '구소수간'(歐蘇手簡.송나라 문인 구양수와 소동파의 글 모음)을 수도 없이 반복해 읽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지금은 물론 왕조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국민을 위함'(for the people)은 동서고금, 체제의 다름과 관계없이 국가경영 리더십의 요체다.

고전 읽기와 정치현실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통해 실력을 쌓고 지혜를 얻어 32년간 조선을 탄탄하게 경영했던 세종의 리더십은 지금도 벤치마킹의 귀중한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정윤재 세종국가경영 연구소 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