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8) 제79화 육사졸업생들-생도1기 임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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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0년7월10일 상오10시. 기다리고 기다리던 생도l기생의 임관식이 육군본부가 임시로 설치된 대전시내 충남도청 광장에서 베풀어졌다.
원동국민학교에서 트럭에 분승한 생도l기생 1백34명이 식장에 도착하자 대전까지 피난와 있던 육군 군악대가 주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생도1기생보다 먼저 원동국민학교를 도보로 출발한 생도2기생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광장 뒤쪽에 모여있었다.
생도1기생들은 생도2기생 앞에 정렬했다.
곧이어 작업복 차림의 정일권참모총장과 강문봉작전국장, 황헌친대령 등 육본 고급간부와 이준식교장, 김웅수생도대장, 손관도중대장, 그리고 지도관들이 임시로 가설된 천막속에 임석했다.
국민의례에 이어 졸업장 수여식 순서가 진행되었으나 경황중에 졸업장을 만들지 못해 생도대표 1명에게만 붓으로 쓴 졸업장이 전달되고 계급장 수여는 생략했다.
보직발령도『대표 1명외 ○○명』식으로 하달됐다. 어디서 구했는지 졸업 선물로 가죽 케이스에 든 단도 1개씩이 전달되었다.
이어 남상선화랑회장이 생도대표로 답사를 했다.
『국가가 1년간이라는 수학연한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간이의식을 통한 임관식이라 할지라도 국가와 민족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우리 1기생 생도중 l백34명만이 이렇게 영광스럽고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지 못하고 입원중인 20명과 전사했거나 적 치하에서 우리들의 진격만을 고대하고 있을….』
답사가 끝나기도 전에 식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생도2기생들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통곡소리 때문에 몇차례 중단된 답사가 끝나자 군악대는 육사교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했다. 생도들은 교가를 힘차게 불렀다.
요즈음 육사 졸업식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초라한 임관식이었다. 생도2기생들은 반창고를 찢어 선배들의 철모에 붙여 주었다. 이른바「반창고 계급장」을 단 것이다.
졸업식에서 부여된 군번도 요즘처럼 성적순이 아니고 구대별 내무반 순이었다. 그래서 생도1기생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군번을「침대군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무반에 놓인 침대순서 대로 매겨졌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임관한 1백34명은 대구·부산·마산·광주·순천 등 5개 지역의 연대 신설요원으로 발령이 났고 전사·실종·입원중인 생도들은 일단 육군본부부로 발령을 받았다.
트럭을 타고 다시 원동국민학교로 되돌아온 신임 소위들은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이날 저녁에는 손영도대전시장(손재식통일원장관 선친)이 베푼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신임 소위들은 자신들만 초대되고 2기 생도들은 만찬초대에서 빠진 것을 알고 2기생도 참석시켜 줄 것을 요청, 허락을 받았다.
내일이면 뿔뿔이 흩어져야할 동기생들과의 작별도 가슴 아팠으나 2기생들의 앞날이 더욱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2기생들은 7월8일자로 육군사관학교의 임시휴교령이 내려진 터여서 안절부절못한 처지에 있었다.
이날 밤 만찬은 그런대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고 한다. 대전에 미24사단이 이미 도착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1일 아침 대전역은 첫 부임지로 떠나는 신임 소위들과 그들을 환송하러 나온 교관·생도대 하사관·2기생도, 그리고 가족친지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호남방면으로 가는 소위들은 트럭을, 대구·부산방면으로 떠나는 소위들은 임시열차를 이용하도록 돼 있었다. 신임 소위들은 조금이라도 더 동기생들과 정을 나누고 떠나려고 저마다 이 열차에서 저 열차로, 이 트럭에서 저 트럭으로 왔다 갔다 했다.
부산행 열차가 긴 기적을 울리며 육중한 몸을 서서히 남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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