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관광 거절한 롯데관광 … 현대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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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이날 현대아산 임직원에게 보낸 e-메일에서 '종기'와 '형제'라는 표현을 통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메시지를 보냈다. 북측이 복권을 요구했던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을 몸을 곪게 하는 '종기'로 비유한 동시에 북한을 천륜(天倫)의 '형제'라고 불렀다. 현 회장은 "우리는 몸 내부의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한 뒤 "우리의 형제(북한)가 인정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며 북측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현 회장은 특히 지난달 12일 "대북사업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기로에 선 듯하다"고 천명한 데 이어 이번 메일에서 다시 한번 배수진을 쳤다. 현대가 "종기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그것이 커져 팔다리를 잘라내야 할지 모른다"며 북한이 거듭 문제를 제기해온 김윤규 전 부회장 경질 문제에 대해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편 개성관광을 추진해온 롯데관광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현재로서는 북측으로부터 제안이 와도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며 개성관광 사업에서 일단 발을 뺀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롯데관광 측은 "개성관광 사업은 현대아산과 북한의 계약관계가 분명하게 정리돼야 추진할 수 있다"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정서"라고 밝혔다. 국내 기업들이 북한의 대북사업 경쟁 유도에 끌려가선 안 된다는 여론의 역풍에 밀려 개성관광 참여의사를 발표한 지 이틀 만에 중도에 포기한 셈이다.

개성관광 사업권을 둘러싼 혼란이 정리됨에 따라 이제 개성관광 등 대북사업의 '공'은 북한으로 넘어가게 됐다. 롯데가 개성관광을 위한 북한과의 접촉을 포기한 마당에 대북사업에 손을 댈 국내 기업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은 현대와 다시 손을 잡고 개성관광을 시행하든지, 아니면 현대와 합의한 개성관광을 없던 일로 하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롯데관광은 11월 개통 예정인 경의선 철도를 이용한 북한 열차관광 사업은 계속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롯데관광은 한국철도공사와 합작으로 만든 'KTX레저관광'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대북 접촉 승인을 받고 이 사업에 대한 협의를 해왔다.

롯데관광의 이날 발표로 개성관광 사업권을 둘러싼 혼란은 일단락됐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책임 문제도 불거졌다. 정부가 현대 측의 개성관광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을 듯한 태도를 취한 가운데 롯데관광이 한때 대북사업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혼선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대북경협의 기준 없이 여론의 눈치보기에 급급해 결국 현대와 롯데관광, 현대와 북한 간 갈등을 키웠다고 비판하고 있다.

남북경협진흥원 임완근 원장은 "국내 기업끼리 대북사업 경쟁을 하면서 대북사업 자체가 자칫 궤도에서 떨어지면 남북관계 위축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며 "현재 대북사업 가운데 가장 높은 성공 가능성이 있는 현대의 사업이라도 성공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 교수는 "남북 경협의 합의사항을 북한이 반드시 지키도록 정부가 북한과의 협의를 통해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롯데관광은 롯데그룹과 무관=롯데관광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희(59) 동화면세점 대표의 남편 김기병(67)씨가 운영하는 회사로 롯데그룹과 무관하다. 롯데그룹은 "롯데관광은 롯데그룹 44개 계열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여행사"라고 밝히고 있다. 롯데그룹 측은 "1971년 롯데관광이 설립될 때 신 회장이 여동생을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롯데' 명칭과 로고를 쓰도록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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