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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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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양반은 양반답게 처신하라'는 우리 속담과 통한다. 프랑스어 'Noblesse(귀족)'와 'Obliger(의무를 지우다)'를 합친 말이다. 1808년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1764~1830년)가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 천 년을 관통한 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고 강조했다. 로마의 귀족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전쟁이 터지면 귀족들은 솔선수범해 최전방에 나가 싸웠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선 금쪽같은 재산을 사회에 흔쾌히 내놓았다고 한다.

그는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오랫동안 거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회지도층의 역할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조선시대 최고 부자였던 '경주 최부잣집'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 집안이 16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300년 동안 9대의 진사(進士)와 12대의 만석꾼을 배출한 데는 비결이 있었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조용헌씨는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란 책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조선시대의 정신이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규정했다.

우리 주위엔 고위 관리, 부자, 지식인 등 자칭 노블레스가 버글거린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면하는 이들이 많다. 이를 두고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병든 또는 부패한 귀족'이란 뜻)'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입으로는 사회정의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탈세.편법.투기 등을 꾀하는 사이비 노블레스를 빗댄 말이다.

지난 5일 서울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1+1 자원봉사 서약식'이 열렸다. 이 작은 불씨를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길 기대해 본다. 사회지도층이 자신의 부.명예.권력을 사회와 나누는 변화 말이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