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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양성은 너만 할 수 있다” 린뱌오에 군정대 맡긴 마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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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호 29면

소련에서 귀국 직후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기념사진을 남긴 린뱌오(오른쪽). 1942년 2월 22일 옌안. [사진 김명호]

1941년 12월 29일, 소련 군용기 한 대가 신장(新疆)성 디화(迪化·지금의 우루무치)에 착륙했다. 3년간 소련에서 요양을 마친 린뱌오(林彪·임표)가 창백한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군통(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요원들이 린뱌오를 에워쌌다. “국장의 명령을 받았다. 옌안(延安)까지 우리가 안전을 책임지겠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09>

옌안은 란저우(蘭州)와 시안(西安)을 경유해야 했다. 란저우에 도착한 린뱌오는 간쑤(甘肅)성 주석의 영접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따라온 소련인 수행원이 구술을 남겼다. “주석은 성장(省長)을 대하듯이 하라는 위원장의 분부가 있었다며 정중했다. 현지의 국민당원과 군 지휘관들도 30대 초반의 청년 장군에게 온갖 예의를 갖추며 경의를 표했다. 열흘간, 하루도 빠짐없이 환영 잔치를 열었다. 한때 린뱌오의 목에 거금의 현상금을 내걸었던 사람들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린뱌오도 옛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황푸군관학교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됐다.”

시안에 도착한 린뱌오는 팔로군 연락사무소가 있는 치셴좡(七賢莊)에 짐을 풀었다. 전선에 있던 후쭝난(胡宗南·호종남)이 린뱌오를 찾아왔다. 린뱌오는 황푸 선배인 후쭝난에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서북왕 후쭝난은 흐뭇했다. 포옹으로 답례했다.

홍군대학의 후신인 항일군정대학. 대도시에서 온 지식청년들을 혁명간부로 양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린뱌오와 장시간 얘기를 나눈 후쭝난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린뱌오는 국·공이 합작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삼민주의에 대한 이해도 깊었습니다. 공산주의도 따지고 보면 삼민주의나 그게 그거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로군에 무기를 공급해 달라기에 수락했습니다. 의료시설이 부족하다는 말에 우리 측 군의관을 파견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옌안까지 안내하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 없다며 군사 관련 서적이나 달라고 하더군요. 위원장의 안부와 황푸 시절을 회고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린뱌오의 요청을 들어줘야 할지 지시 바랍니다.” 장제스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린뱌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라.”

옌안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린뱌오의 전문을 받고 기분이 좋았다.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전보를 보이며 싱글벙글했다. “린뱌오는 전쟁도 잘하지만 타고난 천재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그간 미진했던 국민당과의 합작을 공고히 했다. 스탈린이 뭘 먹였는지 건강도 좋아진 것 같다. 그래도 워낙 약골이다 보니 돌아오면 더 쉬게 해야 한다. 소련에서 부인과 이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신붓감을 구해봐라. 나도 찾아보겠다. 내가 사는 동굴 옆에 신방을 차려주겠다.”

1942년 2월 중순, 린뱌오가 시안을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잠을 설쳤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숙소를 뛰쳐나왔다. 당시 중공 중앙 서기처에 근무하던 스저(師哲·사철)가 이날 마오쩌둥의 행적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른 아침, 우연히 마오 주석과 조우했다. 린뱌오가 돌아온다. 만나러 가는 길이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총사령관 주더(朱德·주덕)가 전선에서 돌아오거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런비스(任弼時·임필시)가 소련에서 귀국할 때도 주석은 마중 나가는 법이 없었다. 1940년, 저우언라이가 옌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늦은 시간까지 잠에 취해 있었다. 리푸춘(李富春·이부춘)이 올 때 마중 나간 적이 있었지만, 그건 리푸춘 때문이 아니라 리의 부인 차이창(蔡暢·채창)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소년 시절 주석은 차이창의 오빠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차이창을 친여동생처럼 아꼈다. 당시 린뱌오의 지위는 주더, 저우언라이, 런비스, 리푸춘에 비하면 한참 아래였다. 그날 따라 날씨가 유난히 추웠지만, 주석은 미동도 안 했다. 거리를 응시하며 린뱌오를 태운 차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린뱌오가 차에서 내리자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린뱌오도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린뱌오가 뭐라고 하자 어린 게 뭘 아느냐며 엉덩이를 몇 차례 손으로 두드렸다. 린뱌오가 투덜대자 손가락질하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웃어댔다. 주석은 2월 17일 밤에 열린 환영대회에도 참석했다. 린뱌오가 한마디 할 때마다 박수를 쳐대며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아무도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마오쩌둥은 항일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린뱌오를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았다. 20년 전 쑨원(孫文·손문)이 장제스를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발탁해 혁명간부를 양성했던 것처럼, 린뱌오를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 교장에 다시 임명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해라. 혁명은 불(火)로만 되는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려면 바람(風)이 필요하다. 신문을 발간하고,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어라. 학생들에게 무조건 진공(進攻)을 강요하지 마라. 진공에는 조건(條件)이 따라야 한다. 단, 조건이 없어도 진공은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라. 기본이고 중심이기 때문이다. 조건을 만드는 법을 애들에게 가르쳐라. 그래야만 대사를 이룰 수 있다. 그걸 할 사람은 중국 천지에 너밖에 없다. 린뱌오가 한 명인 것이 애석하다. 네가 500명만 있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린뱌오에 대한 신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장제스가 회담을 요구하자 린뱌오를 대신 파견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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