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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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공 야구팀이 서울에 온다는 외신이 있었다. 사실이라면 이번엔 시합을 위한 정식 입국이다.
올 가을 서울에선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는 오는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앞둔 아시아 제국들의 실력 탐색전이기도하다.
입국여부는 둘째치고 우선 중공의 야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이들의 구역은 이제 겨우 9년 남짓하지만, 그 동안 공부는 착실히 했었다.
지난 80년 중공은 야구 본 고장의 실력 있는 이론가까지 초청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먼트 미드대학 명코치「빌·어즈」씨. 중공 전역에서 뽑힌 코치 49명과 동석의 선수들이 3개월간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 이듬해엔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 묘미우리 자이언츠의 전 감독「나가시마」(장도)와 홈런왕 왕정치를 중공으로 불러 실기를 터득했다.
이론과 실기, 그야말로 문무의 겸전이다. 더구나 이념이 다른 중국인선수(왕정치)까지 초청한 것은 그들의 열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야구를 중국사람들은 「봉구」라고 한다. 초원에서 하는 경기라는 뜻으로 일본인들이「야구」라고 명명(1894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인들은 「배트」(봉)에 주목했다. 공격적인 자세다. 「베이스 볼」이라는 원래 명칭은 역시 미국인의 기질이 그대로 나타난다. 야구에서조차도 기지, 거점 확보에 더 관심이 크다.
중공은 야구용어만은 중공 식으로 바꾸었다. 호구(스트라이크), 괴구(?구=볼), 안전(세이프), 출국(아웃), 본누타(홈런), 안타(히트), 삼타부중(삼진), 정채표연(파인 플레이), 접수(캐처), 투수(피처)-.
선수들은 대부분 2O대 초입으로 학생, 교사, 노동자 출신. 그 중에는 1백m를 14초로 달리는 선수, 신장186cm, 체중82Kg의 거인투수도 있다.
중공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부르좌 스포츠인 야구에 눈을 돌린 것은 1974년. 그때 서안에서 열린 제1회 전국 봉구대회엔 23개팀이 참가했었다.
그때만 해도 강타, 장타가 없는 번트 빈발의 조용한 경기였다. 안타나 「정채 표연」에 관중들의 박수는 요란했지만, 선수들 사이엔 더블 플레이나 도루(도루), 헤드슬라이딩과 같은 익사이팅 장면이 없었다.
중공인들의 스포츠 모토는 『우호제일, 승부 제이』-. 야구의 생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한발, 두발 야구의 세계에 다가서면서 그런 모토도 퇴색하기 시작. 요즘은 5만명 수용의 북경 풍대봉구장(전용)이 메워질 정도라고 한다. 전용 야구장은 대련에도 2만명 규모의 것이 2개나 있고 상해, 남경구장도 보수 확장되었다고 한다. 천진엔 야구 용구공장도 생겼다.
미국코치「어즈」씨는 1985년엔 중공의 봉구가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말도 한다.
그쯤 되면 우리와 「야구외교」를 벌일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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