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3)8기생과 정치-제79회 육사졸업생들(1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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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기생 동기회가 파악한 8기생수는 총1천3백39명이다.
그러나 6·25때 3백67명이 전사하고 15명이 실종되는 등 그 동안 순직·사망 등 소위 사고자가 5백20여명에 이르고 7백20여명만이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낸다.
8기생들의 인생분기점은 5·16혁명이 아닌가 한다.
당시 인연이 닿아 5·16에 참여한 동기생은 그 이후의 생을 정치인으로 걸어왔으나 혁명과 인연을 갖지 못했던 동기생들은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8기생을 처음 다룰 때 밝혔듯이 혁명의 사전모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당시 육본에 근무했던 8기생들이 주축이었다.
이중에도 특히 김종필씨를 위시한 육본 정보국 출신이 핵심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육사졸업당시 1등에서 20등까지의 우등생이 육본 정보국이나 작전국에 배치됐던 점만을 든다면 혁명을 주도했던 육본 안의 8기생들은 동기생가운데 엘리트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정보국에 있던 김종필·서정순·이수근·김진구·전재구·전재덕·우정선씨 등은 혁명 후 모두 중정 등에서 주요 직책을 차지했다.
군정이 끝난 직후 6대 국회의원에 참여한 8기생은 모두 핵심주체들로 10명에 달했다.
6대의원이 된 8기생은 김종필·김동환·길재호·오치성·신윤창·오학진·이병용·방성출·서상린·조창대씨 등이었다.
그후 제3공화국 동안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은 이영근(7·9·10대) 채영철 (9·10대) 김상년(8·9·10대) 전재구(9·10대) 정무식(8·9·10대) 정진화(8대) 최종성(8대) 김형욱(8대)씨 등이 있다.
즉, 8기생 국회의원이 모두 18명에 이른다.
후기 참여자들의 대부분이 중정출신으로 제3공화국 당시 중정이 정치과정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나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함께 김종필씨는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당시 가장 핵심적인 자리라 할 수 있는 중정부장을 거친 사람도 김종필씨 외에 김형욱씨가 있다.
김형욱씨는 군정때인 63년7월 김재춘씨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취임, 69년 3선개헌 때까지 6년 동안 권력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3선개헌 때 권총으로 의원들을 협박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했고 이것이 미움을 사 결국 물러났다.
그는 하도 「예쁜 짓」(?)을 많이 한다 하여 「미남」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71년 8대국회 때 전국구의원으로 들어갔으나 10월유신 후 도미, 갖가지 반한활동을 벌이다 79년 10월 파리에서 증발됐다.
또 제3공화국에서 장관을 지낸 8기생은 5명이고 현재 장관인 사람도 2명이 있다.
내무장관을 지낸 오치성씨, 문공장관 홍종철씨, 건설장관 고재일씨, 체신장관 윤여정씨, 무임소장관 길재호·이병수씨 등이 있고, 현역 장관으로는 교통장관인 이희성씨와 건설장관인 김종호씨가 있다.
제5공화국에서 장관을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은 5·16혁명에는 참가치 않았고 줄곧 군에 있다가 뒤늦게 빛을 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케이스로는 현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인 차규혜씨와 현 국회의원인 이범준씨가 있다. 이씨는 5·16에 참가치 않고 군에 있으면서 중장으로 예편, 항만청장으로 있다가 제5공화국에서도 발탁됐다. 제3공화국의 정·관계를 주름잡았던 8기생들은 제5공화국에서는 모두 뒷전으로 물려나 쉬고 있다.
김종필씨는 80년 이후 청구동자택과 서울 영동호텔 앞 개인 아틀리에에 나가 그림을 그리며 소일해오다 최근 도미했고 오치성씨는 「5·17」계엄확대조치이후 잠적했다. 길재호씨는 71년 소위「10·2항명」 파동 때 공화당을 나온 후 삼정펄프회사를 차려 사업에 손을 댔다. 그러나 재미를 못보고 생명보험협회장에 잠시 머물렀다가 현재는 양주의 농장에서 지내고 있다.
또 김동환·홍종철·조창대씨 등은 이미 타계했다.
혁명주체 8기생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 인생의 무상함과 권력의 덧없음을 더욱 실감케 한다.
권력이나 이익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얼마나 간사하고 악해질 수 있으며, 또 그 이익 때문에 죽마지우가 원수가 된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아왔다.
혁명전까지만도 개인의 친속관계를 따지면 옥창호·김형욱·길재호씨 등 3명이 가장 절친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형욱씨는 자신의 정보부장 자리에 동기생 옥창호씨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옥씨 집에 요원을 배치해 감시하게 하는 등 권력을 앞에 놓고는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특히 친김·반김의 세력싸움에서 그들 나름의 아름다웠던 인간관계가 송두리째 붕괴되고 원수지간처럼 되었던 점등은 이제 서글픈 역사의 한 장으로 넘어갔다.
8기생 가운데 상당수는 혁명에 참가 또는 동조했거나 소극적으로 군에 남아 뒤에 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애당초부터 혁명에 적극 반대해 혁명을 저지했던 사람도 없지 않다. 방자명씨(당시 중령)같은 분은 5·16 당일 혁명 저지 헌법들을 이끌고 한강 인도교까지 진출했었고, 그후에도 혁명반대라는 소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장도영 등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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