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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주택에서 느리게 살기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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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에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훅 들어와 저절로 정신이 번쩍 뜨인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온몸으로 흙냄새를 맡는다. 김용철·문미영 씨 부부는 아파트에 살면서 놓쳤던 소소한 행복을 하나씩 찾아가는 중이다.

1 프로방스 스타일의 부엌 전경. 서까래와 기둥은 최대한 원형을 복원해 전통 가옥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황토벽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 이국적인 느낌을 가미했다. 부엌 한쪽에는 기존의 아궁이를 그대로 살려 밥할 때 사용한다.

2, 3 집 뒤편 토방과 연결되게 데크를 시공해 테라스를 만들었다. 틈만 나면 부부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대학생인 남매가 놀러 오면 바비큐 파티 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외관 벽면과 데크 양쪽 모퉁이에 야외 조명을 달아 밤에 더 운치 있다.

부부, 주택살이를 시작하다

누구네 할 것 없이 밥시간이 되면 지붕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소한 생선 냄새,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바람을 타고 건너오면 말해주지 않아도 오늘 어느 집은 조기구이를 먹겠구나 짐작했었다.

문미영 씨는 지붕 위로 피어오르던 연기만으로 평화롭고 아늑함을 주던 어릴 적 시골집에 대한 추억이 20년 넘게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도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부엌에 아궁이 걸고, 문 열면 마당이 바로 보이는 그런 주택에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빈티지 소품을 발견하면 나중에 주택에서 쓰면 좋겠다 싶어 구입했고, 질그릇과 도기를 하나둘 사 모으며 천천히 주택살이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지난 3월 고향집을 지키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즈음 해양경찰을 천직으로 여기던 남편 김용철 씨가 건강상의 문제로 명예퇴직을 고민하게 되었다. 부부는 인생 2막을 어떻게 꾸릴까 고심하던 중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현대식으로 개조한 충남 서천의 한 농가주택을 보여주는데 제가 꿈꿔왔던 딱 그런 집이었어요. 저런 집에 살면서 남편 건강 챙겨주고 양껏 작품 활동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문미영 씨는 시어머니의 유산이자 남편이 나고 자란 고향집을 고치고 다듬어 전원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자신의 드림 하우스를 실현해줄 사람은 서천 농가주택을 공사했던 디자이너 오미숙 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벽체 일부가 무너지고 기둥과 서까래가 내려앉는 등 불완전한 요소가 많았지만 고향집을 복원코자 하는 부부의 간절함이 오미숙 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미숙 씨가 작년 7월 첫 번째 작업 이후 다시 농가주택 공사를 맡은 건 16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건평 28평 위 방 4칸짜리 집 한 채와 창고가 ‘ㄱ’자 구조인 전형적인 시골집의 변신이 시작되었다.

1 최소한의 가구와 소품만 들인 안방은 안주인의 정갈한 솜씨를 느낄 수 있다. 자수로 장식한 화이트 커튼과 깔끔한 티슈 커버, 초등학교용 의자의 꽃 그림은 모두 문미영 씨의 작품.

2 창고를 개조한 손님방.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납장은 젊을 적 가구 만드는 일을 했던 김용철 씨의 형님이 어머니를 위해 만든 것으로 깨진 유리를 갈아 이불장으로 사용 중이다.

3 안방 옆에 딸린 공간으로 고재로 만든 문이 인상적이다. 빗장을 열고 들어가면 화장실이 나온다.

4 샤워기와 수전, 세면대, 고재로 만든 선반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들인 게 없는 화장실. 놋쇠로 만든 세숫대야는 문미영 씨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안주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5 본채 왼쪽 귀퉁이에 만든 황토방은 침실로 사용할 예정이다. 모서리에 통창을 만들어 방 안에서 외관을 구경할 수 있게 했고, 공간 활용을 위해 가구 대신 크고 작은 선반을 설치했다.

안주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부엌 전경. 빈티지한 그릇장이 좌우로 하나씩 있는데,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하나둘 사두었던 그릇과 시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들로 채웠다. 개다리소반과 빈티지 라디오, 그리고 문미영 씨가 직접 그린 수채화가 무심한 듯 잘 어울린다.

유럽 시골집을 닮은 농가주택

집은 주인의 성격과 취향 그리고 인생관까지 담아야 하는 법. 오미숙 씨가 그동안 농가주택 공사를 망설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집을 삶의 일부분이 아닌 투자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농가주택에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 부부가 돈부터 생각했다면 다 쓰러져가는 주택을 고쳐 살겠다는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더욱 주인과 꼭 닮은 집을 완성하고 싶었다. 작업 중간에 철제 지지대와 무너진 흙벽을 세워가며 작업해야 할 정도로 집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최대한 옛날 가옥의 형태를 살리는 데 주력했다.

문미영 씨가 꿈꾸던 전원생활 3종 세트, 부엌의 아궁이를 살리고 수돗가의 펌프와 장독대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능적인 부분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겨울철 방한을 위해 외부와 통하는 모든 문과 창은 이중으로 고안했고 집 한가운데 위치한 안방에 화목난로를 놓아 난방을 도왔다.

또 마루에 폴딩 도어를 설치해 겨울에 바깥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는 것을 이중으로 차단하고 여름엔 도어를 접어 방마다 바람이 통하게 했다. 아직 감탄하기엔 이르다. 고재로 만든 부엌문을 열면 프랑스 남동부 시골 마을의 어느 집에 놀러 온 듯 편안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가 난다.

서까래와 기둥 등 전통 가옥의 골조가 화이트 벽과 화려한 패턴의 바닥 타일과 어우러져 유럽풍 인테리어를 완성했기 때문. 거기에 자수와 퀼트가 수준급이고 그룹 전시회에 참여할 정도로 수채화에도 일가견이 있는 문미영 씨의 작품과 그간 모아둔 빈티지 소품을 곳곳에 비치하니 직소퍼즐의 조각처럼 딱딱 맞아떨어진다.

공사를 시작한 지 꼬박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걸려 완성된 농가주택. 문미영 씨는 매일 현장에 나와 공사 진행 상황을 체크할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집을 철거하던 날에 봄에나 볼 법한 샛노란 나비 한 마리가 세 차례나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집 주변을 도는데, 어머니가 당신이 살던 집 잘 고치나 보러 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집은 시부모님이 결혼하고 장만한 첫 번째 집이자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던 곳인데 애정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러니 제가 이 집을 어떻게 소홀히 여기겠어요?”

시어머니가 반평생 넘게 최고의 안식처인 양 믿고 살았던 그 집에서 문미영 씨는 남편과 함께 천천히 사는 법을 터득 중이다. 날이 풀리면 화단을 가꾸고 집 뒤편 텃밭에 농사도 지으며 도시에서 맛보지 못한 다른 행복을 즐길 예정이다.

1 고즈넉한 분위기의 별채 외관으로 담처럼 쌓은 벽돌은 지붕에 사용하던 것을 재활용한 것. 창고로 사용하던 별채를 작업실과 손님방으로 개조했다.

2 펌프의 형태를 살린 수돗가, 그 뒤로 장독대를 만들었다.

3 본채 정면 모습. 왼쪽 통창 있는 방이 황토방, 폴딩 도어를 열고 마루를 지나면 안방, 오른쪽 고재로 만든 문은 부엌 공간이다.

4 집 뒤 데크에서 바라본 안방 창문. 격자 창문을 이중문으로 만들어 방한 효과를 높였다.

기획=이미주 레몬트리 기자, 사진=신현국(CLIX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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