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1년 살기 … 세 딸 더 크기 전에 결단 내렸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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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계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1년간 한국살이에 도전한 노익환 변호사(오른쪽)와 가족들. 다른 재미동포 열 가족도 이들처럼 한국에서 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 노익환]

변호사 경력으로는 황금기였다. 수임 사건이 많았다. 다니던 로펌에선 회사명에 이름(성씨)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으로 고액 연봉에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안락한 집까지. 한국계 재미동포 2세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공을 구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남다른 선택을 한다. 1년간 한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딸 셋(11살, 10살, 5살)에게 한국계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자신은 잘 못하지만, 아이들이 한국말도 제대로 배우길 바랐다.

 노익환(45) 변호사의 얘기다. 한국인 부모의 이민으로 미국에서 자라온 그는 지난해 7월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잠실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인근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보낸다.

 6개월여가 지난 10일 그와 부인 바니(39)를 만났다. 바니도 역시 한국계 재미동포 2세 변호사다. 인터뷰에선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였다.

 이들은 “‘가나다’만 겨우 알던 아이들이 이젠 직접 한글로 쓰고 읽는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처음엔 한국서 사는 걸 부담스러워하던 아이들이 한국을 더 좋아하고, "나중에 미국 친구들을 데리고 한국에 오고 싶다”고 할 정도로 바뀌었다.

 이들의 도전은 미국 한인사회에서 소문이 났다. 바니는 “일본계·중국계 미국인에 비해 한국계는 서로 잘 챙기는 것으로 미국에서도 유명하다”며 “요즘 ‘우리도 한국에서 살아보려는데 아이들은 어떤 학교를 보내면 되느냐’는 문의 전화와 e메일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에게 연락해온 이들만 10가족이 넘고, 실제 한 가족은 지난해 말부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경력 자살(Career suicide)’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창 자랄 시기인 이 때가 아니면 오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이겨냈다. 한국살이를 준비하던 지난해 4월엔 세월호 참사까지 터졌다. 주변에선 “한국에서 사는 게 아이들에게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도 이들은 아이들에게 사건을 설명하며 당부했다고 한다. “한국 아이들이 어른 말을 따르다 희생되는 일이 있었는데, 안전 문제에 대해선 직감을 따르라”고.

 한국선 다른 시행착오도 겪었다. 첫째 딸은 축구를 좋아하는데 한국에선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축구팀을 찾기 어려웠다. 남자 아이들 팀에 들어갔더니 공을 차주지 않아 마음 고생을 했다. 그러다 한 여자 아이가 활동하고 있는 축구팀을 발견했고, 그곳에선 남자 아이들도 여자 아이에게 공을 차줘서 재미있게 뛰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의 교육열에도 혀를 내둘렀다. “둘째가 발레 학원에 다닌다. 미국에선 아이가 아프면 아예 강의에 못 들어오게 하는데 한국에선 아파도 보내라고 하더라.” 이들은 한국살이의 좋은 점으로 “편리한 게 많다. 교통 수단도 잘 돼 있고 배달도 잘 된다”는 점을 꼽았다. “사람들이 휴가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인상적이라고 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서울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한다”며 다가오려 하지 않는단다. 아이들도 아직 친구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만큼 가족끼리 더 가까워지는 계기는 됐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외모만 한국인일 뿐, 외국인이라는 생각도 자주 한다”고 했다.

 이들은 8월에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앞으로도 한국에 자주 오갈 생각”이라고 했다. 의문을 떨치기 어려웠다. 여러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살이를 해야했을까. 그러자 예상외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국적은 미국이지만, 한국계란 정체성은 버릴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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