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참전 없었다면 수용소 있었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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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대통령의 방미 이틀째 일정은 미국 경제계 핵심 인사들에 대한 투자 요청과 세일즈 외교에 초점이 맞춰졌다.

빡빡한 행사를 소화하면서 盧대통령은 "뉴욕 증시에서 기침을 하면 한국 시장이 감기에 걸릴 정도라는 세계 경제의 심장부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며 "우리 시장에 대한 미국 시장의 충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안정을 위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다짐도 빠트리지 않았다.

◆"미 참전 없었다면 정치범됐을 수도"=盧대통령은 13일(한국시간) 코리아 소사이어티(회장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가 주최한 만찬 간담회(피에르 호텔)에 참석했다.

이건희(李健熙)삼성 회장과 로버트 루빈 시티그룹 회장이 공동 후원했고, 토머스 폴리 전 하원의장.아서 라이언 프루덴셜 회장.피터 피터슨 미외교협회(CFR)회장 등 미 정.관계와 경제.언론계 인사 7백여명이 참석했다.

인사말에서 盧대통령은 "1998년 금융위기 직후 김대중(金大中)전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 월가의 여러가지 조언을 받아들여 한국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며 "우리는 이제 북핵과 경제위기를 맞고 있으나 이번에 미국을 다녀가면 또다시 극복하리라 믿고 있다"고 했다.

盧대통령은 "앞으로 투자를 많이 할 것이라고 격려해 준 루빈 회장과 인사말에서 저를 각별히 소개해 준 이건희 삼성 회장께 특히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李회장은 직전 환영사에서 "盧대통령은 21세기 한국의 비전이자 희망"이라고 소개하며 한.미 혈맹관계를 강조했다.

盧대통령은 "행사 참석자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코리아 소사이어티 지도자들의 능력 때문이라고 했더니 그레그 회장이 '그게 아니라 바로 당신이 누군지 보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 웃음이 터졌다.

盧대통령은 "내가 누군지 여러 차례 같은 약속을 반복해도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간단히 표현하겠다.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유화 발언에 만찬에 참석했던 한 민주당 의원은 "쑥스러울 정도였다"고도 했다.

◆"지금이 바로 투자의 기회"=盧대통령은 이에 앞서 월가를 주무르는 뉴욕 금융계 주요 인사를 숙소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초청, 오찬 간담회를 열고 투자 유치 활동을 했다.

초청 대상자는 루빈(전 재무장관)회장과 데이비드 록펠러 전 록펠러재단 이사장, 루이스 가스너 칼라일 그룹 회장, 로버트 스코트 모건 스탠리 회장, 스티븐 포크 CSFB 회장, 데이비드 콜 JP모건 체이스 부회장 등 11명이다.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인 AIG의 위스너 부회장이 "한국 경제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지만 남북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며 향후 전망을 물었다.

盧대통령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부시 대통령의 어떤 선택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선택에 앞서 미국민의 의견, 오랜 맹방인 한국과 한국민의 의견을 존중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답했다.

盧대통령은 "한국 문제(북핵 문제)는 잘 풀릴 것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한다"며 "이때가 바로 (투자의)기회"라고 해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골드먼 삭스의 호메츠 회장이 한국 경제정책의 일관성에 대해 묻자 盧대통령은 "선진국인 미국도 엔론 사태 이후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상당히 놀랐다"며 "재벌의 금융 지배를 억제하는 정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유엔 사무총장 면담=코피 아난 총장을 유엔본부로 찾아간 盧대통령은 "한국은 유엔의 지원으로 복구된 나라"라며 한반도 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과 한국인의 유엔 직원 채용 확대를 당부했다.

코피 아난 총장은 "盧대통령의 평화번영 정책과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지지하고 동의한다"고 밝혔다. 이날 총장 사무실을 찾은 盧대통령이 시간이 어긋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30초 정도 혼자 서 있는 의전상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盧대통령의 부인 권양숙(權良淑)여사는 12일 낮 뉴욕 한글학교 교사와 간담회를 열어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영어 교육도 잘 받아야 하지만 우리말.우리글에도 긍지를 가져야 한다"며 교사들을 격려했다.

뉴욕=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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