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만든 신문|신문의 날에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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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무엇이 뉴스인가』-, 이런 제목의 책이 있었다. 미국 콜럼비아대학 사회과교수「허버트·J·갠스」의 저서『디사이딩 워츠 뉴스』 (Deciding What's News) .
신문학교과서 같지만 그게 아니다. 1979년, 미국언론으로 치면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사건등 산전수전 다 겪고 난 후에 나온 근저다.
더구나 뉴스의 현장을 뛰어다니는 기자들, 그들 회사의 간부들(데스크)을 삼대로 인터뷰한 결과가 내용의 주축이다
미국전역을 커버하는 TV뉴스의 리포터들, 타임·뉴스위크 주간지기자들까지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바로 이 뉴스제작자들로 하여금『무엇이 뉴스인가』에 대답하게 한 것이다. 이른바「뉴스의 영속적인 가치기준」을 찾으려 했다.
첫째, 자민족중심주의 (Ethno-centrism) 전쟁기사에서「닉슨」대통령사임에 이르기까지 좋든 나쁘든 「내나라 사람들」의 일에 더 큰 관심과 비중을 둔다.
둘째, 타애적 민주주의. 해외뉴스에서 민주국가를 독재국가보다 우선해 취급한다. 국내뉴스에선 부패·대립·저항·관료주의 비판을 통해 「타애적」민주주의를 실천한다.
세째, 책임있는 자본주의. 가령 독점은 나쁘지만 오늘의 많은 독점체제는 공격하지 않는다. 번영을 창출하는 경쟁은 미덕이지만 부당한 돈벌이는 비판한다.
네째, 「스몰 타운」목가주의. 시골의 생활에 로맨틱한 향수를 갖는다. 감성적인 뉴스 같지만 그래도 좋다.
다섯째, 개인주의. 공공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에 참여하는 개인용 높이 평가한다. 「지배의 손」을 휘두르는 국가나 사회에 감연히 맞서서 개인의 자유를 지킨다.
여섯째, 온건주의. 극단과 과격은 억제되어야한다. 법률이나 영속적 가치에 위배되는 개인주의는 반갑지 않다.
일곱째, 사회적 질서의 유지.「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직후 미국의 매스컴들은『국민은 패닉 (공포)에 휩쓸려서는 안된다』고 보도했다.
여덟째, 국가적 리더십. 국가의 리더십은 질서의 궁극적 보호자이며 국내 평온의 마지막 지주다. 도덕적 리더로서 국가의 리더십은 존중된다.「갠스」저서의 핵심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우선 똑같은 질문과 답변을 미국 아닌 다론 나라, 가령 아시아의 어느 일각쯤에서 제기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글쎄, 뉘앙스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오십보백보일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본령에 가깝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더러는 미국다운「한가로움」도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 나름의 일리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아뭏든 장담은 못해도 미국의 국민이나 독자들은 그런 언론을 갖고있는 것에 적이 안도할 것 같다.
미국의 정치인, 집권자들의 심중은 어떨까. 역시 마찬가지 일것 같다. 「카터」는 그런 언론에 힘입어「시골뜨기」이면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그 반대당 출신인「레이건」도 마찬가지다. 물론 쫓겨난 대통령도 있지만….
오늘 미국이 강한것은 챌린저 우주선이나 퍼싱미사일의 저력이 아니다. 바로 「영속적 가치」를 스스로 지킬수 있는 언론, 또 그것에 박수를 보내는 국민들의 힘이다. 이것은 미국을 지탱하는 뚝심이기도하다.
이런 「영속적가치」들을 신뢰하는 사회는 비록 그것이 미국이 아니라도 강하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미국의 매스컴들이 「타애적 민주주의」를 말할때 정부는 차라리 아픔을 참는다. 아니 달게 받는다. 그들은 국가에 위기가 닥칠때 언론이 둘도 없는 방패가 된다는 마지막「보상」을 충분히 받을수 있는 것이다. 그이상 값있는 것도 없다.
국민들은 그런 언론을 신뢰하기 때문에 「사회적 질서」나「국가적 리더십」을 강조하면 그것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이 그 나라의 힘이요 안정의 기틀이다.
미국이라고「영속적 가치관」을 지키는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문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난「애그뉴」부통령 같은 사람은 기자를 두고「이념적 내시」니, 위선자라고 욕한 일이 있었다. 「레이건」대통령은 기자회견의 스타일을 바꾸어 자신이 질문기자를 임의로 지명하겠다고 고집한다.
「영속적 가치」란 이처럼「긴장」을 생명력으로 하고 있을때 오히려 빛난다.
언론과 독자와 권력이 밀월 한다면 그런「영속적 가치」의 기준은 필요도 없다.
「잘했군, 잘했군」이 유일한 기준이다.
기준없는 뉴스의 마지막 피해자는 누구인가. 물론 신문과 독자지만, 마지막 피해자는 따로 있다.
뉴스의 「영속적 가치」를 지키려는 언론은 멀리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뉘앙스는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 가까이에서도 얼마든지 찾을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우리 언론인은 그 점에서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존중하는 풍토야말로 더 존중되어야한다.
「잘했군, 잘했군」하는 신문을 갖고 있는 사회보다 때로는「못했군」도 하는 신문을 갖고 있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뚝심도 있는 것은 웃지 못할 아이러니다.
「국민이 믿는 신문」, 그것은 저마다 「영속적인 가치」를 지키는 신문이며, 신문의 그런 독자적인「영속적 가치」가 존중되고 아낌을 받고 격려 받는 사회야말로 모든 사람에게「살맛」을 갖게 한다. 신문의 날을 보내는 감회랄까. 최종률<중앙일보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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