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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했던 여대생 조현아를 추억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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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디지털 에디터

한 일간지 기자가 1990년대 중반 미국으로 교육 관련 기획취재를 갔을 때의 일이다. 명문 코넬대를 섭외해 찾아갔는데, 학교 측에선 한국인 유학생을 가이드로 배정해 줬다. 평범한 차림의 여대생은 모국에서 찾아온 취재진을 학교 구석구석 안내하며 성실하게 설명했다. 와인 테이스팅 등 외식업과 호텔 경영에 대해 많은 열정을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취재 말미에 기자가 장래 계획을 물었다고 한다.

 ▶기자=“졸업하면 뭘 할 거예요?”

 ▶학생=“호텔사업을 해 보고 싶습니다.”

 ▶기자=(‘집에 돈이 좀 있나?’ 생각하면서) “혹시 집에서 관련 사업을 하시나?”

 ▶학생=“예.”

 ▶기자=(‘부모가 숙박업을 하는 모양이군’) “업체가 어디에 있어요?”

 ▶학생=“제주도요.”

 ▶기자=(농담으로) “칼(KAL) 호텔?”

 ▶학생=“예.”

 ▶기자=(헉-.)

 학생 이름은 ‘조현아’였다.

 ‘땅콩 회항’사건이 터진 뒤 이 기자는 당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친절했던 모습이 떠올라 믿어지지가 않았다고 한다.

 조 전 부사장의 걸어온 길이 궁금해 중앙일보 과거 기사를 검색해 봤다.

 처음 지면에 등장한 건 10년 전인 2005년 12월 상무보로 승진하면서다.

 이듬해 언론과의 첫 인터뷰에서 그는 기내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늘 개선할 여지는 있다”는 말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땅콩 서빙에 화가 날 소지는 9년 전부터 싹이 텄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말도 했다. 승무원들에게 “기내 규정을 어기는 손님에겐 당당히 할 말을 하자”고 주문했다는 거다.

 7일 검찰이 조 전 부사장을 재판에 넘기며 적용한 혐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폭행, 업무 방해 에 위계공무집행 방해까지 추가했다. 사건 당시 그는 1등석 승객 중 한 명이었고 기내 규정 수준이 아니라 법을 어겼으니, 조 전 부사장의 평소 주문대로라면 승무원들은 “당당히 할 말을 했어야” 맞다. 하지만 사무장이 항공기에서 굴욕적으로 내려야 했을 뿐이다.

 검찰이 조 전 부사장의 혐의 내용을 발표하는 장면이 생중계되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다시 관련 글이 쏟아진다. 가끔씩 ‘이번 일을 계기로 인격 수양을 하라’(eagle2080)는 점잖은 충고도 올라왔지만 훨씬 많은 글에서 ‘갑질’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요즘 인터넷은 온통 ‘갑을’ 얘기다. 백화점 주차요원이 모녀 앞에 무릎을 꿇은 사진이 요 며칠 디지털 세상을 흔들었다.

 평소에 멀쩡하던 인물이 ‘을’로 보이는 사람 앞에서 돌변하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동료 의원들에게 친근하기로 이름난 정치인이 현역 의원 시절 보좌진에게는 의원실에서 취사를 요구했다는 얘기 등 끝도 없다.

 이젠 ‘을’을 무서워해야 한다. 일단 비행기에서 쫓겨나고 무릎을 꿇지만 디지털 세상에서는 을에게도 반격할 무기가 많다.

강주안 디지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