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49>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주위 문인 친구들이 주선하여 전주의 시립 도서관에 말하자면 임시 사서직으로 취직했다. 말년의 그는 말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료나 가족들과의 약속은 지킬 줄 알아서 하루에 막걸리 세 잔밖에 마시지 않았다고. 숨가쁘게 변해가던 독재의 시대에 더 이상 세상에 대하여 정이 없던 이 '판문점'의 시인은 어느 눈 내리는 날 소문도 없이 돌아갔다.

나는 이렇듯 옛 사람들이 그립다. 어찌 우리 곁을 떠난 벗들의 얘기를 일일이 다할 수가 있을까. 나중에 세월이 가는 동안 지켜본 그들의 최후를 하나씩 짚어 갈 작정이다. 이를테면 이런 게 글쟁이다. 요즈음 말로 머리통 굴려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퍼올리는 것이다. 그래서는 김수영의 시구처럼 온몸으로 밀어붙여야 한단다. 지금은 어쩐지 너무들 단정하고 쩨쩨하고 몸 사리고 아파트 동네 반바지에 샌들 신은 소시민처럼 걱정도 너무 많구나. 그러고는 책상 앞에 얌전하게 쪼그리고 앉아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에 매달려 고민한다.

대개 1973년부터 74, 75, 유신 초기인 긴급조치 시대의 삼사 년은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모를 정도로 사연도 많아 회상을 하여도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그러니까 얘기가 잠시 어려운 시절의 주위 문인들 행태 얘기로 흘렀지만, 내가 공장과 지방 주유를 하다가 장사 망해 먹은 아내와 함께 우이동 골짜기로 다시 들어갔던 무렵에 연결된다. 그 겨울이었던가, 어느 날 청진동 돼지갈비 집에서였을 게다. 그 무렵에 우리는 드럼통에 연탄불을 넣고 양념 돼지갈비를 구워 주는 소주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당시에 베트남에서 돌아와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김준태를 그 집에서 취하도록 소주를 사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가며 호통을 치던 조태일이도 그 집 단골이었다. 한남철 염무웅과 나와 셋이서 오붓하게 소주 한 잔을 하다가 한남철이 말을 꺼냈다.

-저 말이야 황 형, 내가 어떤 역사쟁이를 만났더니 말이야, 재밌는 얘기를 하더라구. 우리가 알기론 조선조 때 도적이라면 홍길동 임꺽정 정도잖아. 헌데 그치들 찜 쪄먹을 정도로 유명 짜한 도적이 있었다 그런 말이야.

나는 처음에는 그저 심드렁하게 들어 넘겼다. 염무웅의 말로는 그는 정석종이라는 소장파 역사학자인데 '창작과 비평' 다음 호에 실릴 '홍경래란'에 대한 논문이 그럴싸하더라는 얘기였다. 그것도 그저 그러려니 듣고 있었다.

-헌데 말이야, 그 인물이 독특하단 말이야. 글쎄 원래 출신이 광대라나 뭐라나.

그러고나서 며칠 지난 뒤에 우이동 집에서 새벽녘에 깨어났다. 언젠가 백범사상연구소 언저리에 갔다가 백기완에게서 가슴이 서늘한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머리맡에 아내가 전날 밤 떠다 놓은 자리끼의 냉수를 벌컥 들이마시고 숙취의 쓰린 가슴을 쓸어내리다 나는 일어나 앉아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것은 황해도 구전 민담인 '장산곶 매'의 얘기 줄거리였다.

그림=민정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