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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영혼의 아궁이에 첫 불을 당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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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고진하 목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시골 목회를 하고 있다. 몇 해 전 낡은 한옥을 사들여 손을 봤다. 아궁이는 직접 만들었다. 장작을 가져와 넣자 불길이 확 솟아 올랐다. 그는 “모든 불이 첫 불이고, 모든 날이 태초의 첫날이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 영혼의 아궁이에도 불을 때면서 새해를 ‘영원한 지금’의 희열과 함께 살아가자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묵은 기억의 짐 탈탈 털고 길 떠나는 새해 아침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성스러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맘때면 이웃종교의 스님들은 깊은 설산에서 ‘동안거’에 들어 깨달음을 구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새해 첫 주를 홀로 묵언에 들어 하루하루를 신명나게 살아갈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서 아내와 얼굴을 마주쳤는데, 습관처럼 움찔하는 내 입 모양을 보았던지 ‘ㅋㅋㅋ’ 웃습니다. 흰 눈을 머리에 인 명봉산 위로 떠오른 해님도 덩달아 활짝 웃어줍니다.

 밤새 식어버린 구들을 덥히려 장작을 가져다가 아궁이 앞에 앉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새로 만든 아궁이입니다. 잘게 쪼갠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는데, 첫 불을 넣던 순간의 뭉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그래, 매일 지피는 불이지만, 사실 모든 불이 첫 불이지! 그렇다면 저 절절 끓는 구들방에 누가 들어가 지지든, 혼자 지지든 누구랑 붙어 지지든, 매일 밤이 첫날밤이지! 신혼이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매일을 태초의 첫날로, 매일 밤을 신혼의 첫날밤처럼 맞이할 수 있다면, ‘시간이 영원 속으로 녹아드는’ 삶의 융융한 희열을 맛볼 수 있겠지요.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런 희열을 ‘영원한 지금’이라 불렀지요.

고진하 목사

더 나아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곁님들을 ‘영혼의 동반자’(anam kara)로 다정히 팔짱 낄 수 있겠지요. 영혼의 동반자라고 하면 찰떡궁합인 연인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말은 외연이 더 넓습니다. 우리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모든 존재를 신성한 차원으로 드높여 영혼의 동반자라고 하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서로를 ‘그리스도’로, 불자라면 서로를 ‘붓다’로 받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우리 지구별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숱한 다툼과 반목은 좁은 지구별에 사는 이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어린 시선도 자주 만납니다. 종교를 그 어원에서 보면 ‘뒤로 이어준다’는 소중한 의미가 깃들어 있죠. 이슬람 수피인 하즈라트 이나야트는 이런 종교의 속알을 “모든 사물과 존재들은 가장 깊은 중심에서는 모두 하나로 된다”고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눈을 뜨고 사물과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면 겉의 차이 때문에 반목하고 적대할 일이 없다는 거지요.

 수행자들 사이에 전해지는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영적 스승을 찾아 문안인사를 올리고 나서 예쁜 포장지에 싼 선물을 바쳤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제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인데, 황금으로 만든 가위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바친 선물을 받지 않겠다며 도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놀란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이 황금가위는 아주 값진 것인데, 받지 않으시겠다는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스승이 노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가위는 결코 받지 않겠네. 나는 찢거나 가르거나 쪼개는 사람이 아닐세. 만일 바늘이나 실 같은 선물로 가져온다면 내 기꺼이 받겠네.”

 어느 종교의 가르침이든 그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너와 나 사이를 찢거나 가르거나 쪼개는 가위의 정신이 아니라, 그렇게 찢어지고 나뉜 분열과 적대의 관계마저 하나로 꿰매고 이어주는 바늘과 실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늘과 실이라는 이 아름다운 은유가 가리키는 게 뭐겠습니까. 붓다나 노자, 소크라테스, 예레미야,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지혜로운 현자들 같은, 소위 축(軸)의 시대의 깨어 있는 종교의 선각자들이 누누이 강조한 ‘공감과 자비의 영성’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공감과 자비의 영성은 더 이상 어떤 특정종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별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절대가치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치에 대한 우리의 자각은 자본주의적 탐욕의 위세에 짓눌려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종교들 또한 이런 자각에서 멀어지며 크나큰 위기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듯, 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초월의 차원을 발견하고, 공감과 자비라는 삶의 지혜를 선사했던 저 축(軸)의 시대의 통찰로 돌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인류는 정신적 위기 때마다 늘 축의 시대를 돌아보며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뜨겁게 밝힌 지혜의 첫 불! 오늘 우리가 그 첫 불을 기억―기억은 영혼의 중요한 기능입니다―해내고 우리 영혼의 아궁이에 첫 불!을 당긴다면, 우리가 살아갈 처소를 사랑의 온기 가득한 집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종교란 삶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바꾸는 예술입니다. 벗들이여, 부디 새해에는 숱한 집착의 무거운 멍에를 벗고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의 희열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고진하=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감리교 신학대와 동대학원 졸업. 목사이면서 힌두교 경전과 노장 사상을 오랫동안 파고 들었다. 87년『세계의 문학』 통해 시인 등단, 『거룩한 낭비』 등 시집 6권과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쿵쿵』 등 산문집을 냈다. 김달진 문학상과 강원 작가상 수상. 현재 원주 한살림교회에서 시골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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