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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사회학 거장 울리히 벡(1944~2015)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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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사진) 뮌헨대 교수가 지난 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70세. 벡 교수는 독일 위르겐 하버마스, 영국 앤서니 기든스와 함께 현대사회학 흐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인용되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었다. 86년 출간한 저서 『위험사회』는 현대사회학의 고전이다. 서구 중심의 산업화와 근대화가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이 책은 경고했다. 한국 사회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위험사회』 외에도 『정치의 재발견』 『지구화의 길』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경제 위기의 정치학』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지낸 김문조 고려대 교수가 울리히 벡에 대한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울리히 벡은 사회학의 학문적 가치를 만방에 각인시켜, 그 지적 위상을 높여온 선도자요, 공론자다. 아니, 그는 단순한 공로자가 아니라 침체 국면의 사회학에 새로운 가능성과 활기를 불어넣은 ‘현대적 지존(至尊)’이었다. 그의 대표적 저서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위험이 줄고 안전해진다는 그간의 통념을 깼다. 산업사회의 위험은 신변적·국지적 형태였다. 하지만 현대적 위험은 사회 전체나 생태계까지 대상으로 한 포괄적·지구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고도의 기술사회가 되면서, 위험이 일반인들의 통상적 지각능력을 넘어서고 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니고 있음을 주지시킴으로써 위험에 대한 학술적·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학자로 꼽힌다. 마침 『위험사회』 출간 직후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지면서 그의 저서와 주장은 진가를 더 했다. 이후 이어진 연평균 2권 내외의 저서와 많은 논문은 출간과 더불어 학계 안팎에 쓰나미급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다.

 2008년 3월 울리히 벡이 그의 아내와 함께 한국을 처음 찾았을 때를 기억한다. 태안기름유출사고(2007년 12월)와 숭례문 화재(2008년 2월)로 한국사회가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벡 교수 부부와 서울대 한상진 교수댁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국의 ‘위험사회’를 논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원전(原電)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벡 교수는 또 위험의 분배 논리가 기존 부(富)의 분배 논리와 중첩적으로 작동하면서, 노동시장과 복지제도에 대한 의존성을 증대시킨다고 말한다. 이런 것이 연이어 개인화된 피고용 사회를 창출함으로써 계급적 정체성 대신 개개인의 자아 정체성이 강조되는 새로운 사회를 야기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바로 2002년에 그의 아내와 함께 쓴 『개인화(Individualization)』라는 저작의 주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종전의 (외적) 세계화 개념과 대비되는 내적 세계화, 즉 코스모폴리타니즘 연구에 착수해 세계(cosmos)와 지역(polis)이라는 양대 공간을 아우르는 이중적 사회의식의 발양을 역설해 왔다.

 이상과 같은 담론의 뿌리에는 현대사회가 1차적 근대화 단계를 지나 2차적 근대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주장이 내재해 있다. 그는 오늘날 현대인이 일상사에서 체험하는 갖가지 위협은 근대화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의 성공으로 인해 발생한 역설적 결과임을 강조한다. 생부살해의 주역인 오이디푸스왕처럼 근대화는 자신이 쌓아온 성과를 스스로 잠식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근대 산업사회의 성취를 겸허히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성찰적인 근대화라는 것이다. 오늘 그의 부음에 접하고 나니 사회학의 거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물론이요, 겸손한 학문으로서의 사회학 하기에 천착해 온 영적 동반자를 잃었다는 점에서 애도의 마음을 거둘 수 없다.

  김문조 고려대 교수(동아시아사회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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