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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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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회장님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기 위해 장지를 금강산으로 정하려 합니다." 2003년 8월 초. 고인이 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장례를 주관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유가족과 현대그룹 관계자 등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 회장이 유서에서 "명예회장님(고 정주영)께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다"고 지칭한 김 사장의 판단이었으므로 회사 관계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때 정 회장 부인 현정은씨가 나섰다. "취지는 좋지만 남편을 북한에 둘 수는 없어요. 가까운 곳에 모시도록 하세요."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김 사장은 더 이상 주장하지 못했다. 장지는 하남시 창우동으로 결정됐다. 그 장면을 본 몇몇 현대 측 인사는 "현씨가 녹록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말한다.

같은 해 11월 17일. 100일 탈상(脫喪)을 한 현씨는 현대그룹 경영권을 위협하던 시숙부 정상영 금강고려화학 명예회장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다. 정 명예회장이 그룹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계속 매입, 최대 주주가 됐다고 선언하자 한 달 전 이 회사 회장으로 취임한 현씨는 '국민주 공모' 카드로 대응했다. 국민의 힘을 빌려 경영권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승부수는 먹혔다. 시숙부의 승리로 귀결될 것 같던 분위기는 조카며느리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면서 바뀌었다. 금융당국도 정 명예회장 측에 매입주식 처분을 명령하는 등 현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현 회장은 이 일을 거론하면서 "나에게 속배짱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이번엔 북한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을 받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현 회장이 내쳤다는 이유로 금강산 관광객 축소 등의 보복 조치를 취했다. 그러면서 김씨의 복귀를 요구했다. 현 회장은 김씨에겐 비리 의혹이 있는 만큼 복귀는 불가능하다며 "비굴한 이익보다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고 했다. 배짱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얘기다. 현 회장은 '윤리 경영'을 강조한다. "잘못된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를 길들이려는 북한에 당당히 맞서는 힘도 이런 소신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지하의 남편도 그런 아내를 듬직하게 여길 것 같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