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명동을 살다간 보히미언|고 이봉구씨의 명동인생과 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명동백작」이 갔다. 한잔의 술을 마시며 인생과 예술을 이야기하던 문인·예술가들이 몰려 든 50∼60년대 명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소설가 이봉구씨가 29일 67세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지금은 증권회사건물이 된 옛 국립극장옆골목에 자리잡은 주점「은성」의 구석진 자리에 그림처럼 앉아있던 이씨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낭만과 애환과 정을 지닌 문인·예술인들이 만들어 내었던 「문화촌명동」의 조경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8·15부터 60년대중반까지 명동은 예술인들의 집합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격변의 시대를 겪었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고 가난했기 때문에 서로 허물없이 만나 다방과 막걸리집을 전전하며 그윽한 정감의 분위기를 만들어냈었다.
소설가·시인·화가·음악가 연극인들이 구별없이 한데 엉기면서 때로는 원고료가, 때로는 그림값이 차값이 되고 술값이 되었다. 「문화촌명동」에서 이봉구씨는 어느 곳에나 있는 사람이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모나리자」 「돌체」 「동방살롱」 「피가로」등 다방과 「명동장」 「무궁원」 「은성」등 술집에 들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인·예술가들은 꼭 이씨를 찾았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재치있게 이야기했다.
회고담이나 문단이면사를 말할 때면 누구나 귀를 기울였다. 시인 조병화씨는 이씨를 회고하며 『이상의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흥미있어 했다』고 말한다.
이씨는 40년대말 박인환·김광균씨 등 시인과 어울리면서 명동에 나오기 시작했다. 「명동장」 「무궁원」에서 술을 마시고 「돌체」다방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밤이 깊도록 떠나지 않았다.
6·25로 폐허가 된 명동에서 이진섭·조지훈·김종문·김수영씨 등 문인과 박고석·이중섭·천경자씨 등 화가, 성악가 이인범씨, 연극쪽의 이해랑·한민호씨 등과 다시 만났다.
60년대는 「은성시대」라 할만하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모친이 경영한 「은성」은 테이블이 몇 되지 않는 동동주집이었다. 이씨는 언제나 그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귀재로 알려진 전혜린씨는 이곳을 찾아와 이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방을 함께 다녔다. 변진하·박주보·유한철·박용규씨 등도 나왔다.
「은성」에서 이씨는 「60년대식 주법」의 대가였다. 술에 취하기보다는 화제의 풍부함을 즐기던 이 같은 술자리에서 그는 술 한잔을 앞에 놓고 문학과 이슬,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60년대말 문화촌 명동은 끝났다. 명동을 사랑한 많은 문인들이 유명을 달리했고 문인·예술가들의 모임도 줄었다. 또 이들을 아껴주고 이해할 줄 알았던 다방·술집의 여인들도 명동을 떠났다. 이씨는 이처럼 변해버린 명동을 쓸쓸히 지키다가 70년초 고혈압이 심해지면서 발길을 끊었다.
이씨는 지난 67년 『명동』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 그 속에서 그는 정감과 낭만과 따스함이 있었던 명동에서의 문인·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차츰 삭막해지고 돈 바람의 분위기가 감도는 명동을 경계했다. 그는 최근 몇몇 젊은 시인들이 명동에서 시낭송회를 갖는 모임에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50. 60년대의 명동과 같은 예술의 분위기가 살아나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의 그 같은 모임에는 다소 퇴폐적인 점도 있었으나 열띤 대화와 논의속에 예술에의 정력이 있었고 창조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1916년 경기도안성출생인 이씨는 도시적 애수가 담긴 작품과 『도정』등 함께 있었던 예술가들을 모델로 한 소설을 썼다. 그는 조직적생활·세속적출세를 모르고 문학과 예술에만 젖어 살아온 우리시대의 마지막 지적 보헤미안이었다. 그는 명동시대의 낭만을 거두 어 갔다. <임재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