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눈과 눈으로 대화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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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참으로 어렵사리 한자리에 앉게 됐다. 여야 영수회담은 지난 시대의 정치문화라며 '당정분리'원칙을 고수하던 청와대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 어리둥절하긴 하다. 그렇다고 지금 그걸 따지고 싶지는 않다. 모처럼의 만남인데 국민에게 좋은 선물을 주십사 하는 기대와 당부의 말씀을 드리는 게 도리일 듯싶다.

그런데 만남의 성과가 그리 밝아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우선 대화의 주메뉴인 연정(聯政)이 식상한 주제다. 박 대표가 선뜻 받는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일각에선 노 대통령이 박 대표를 차기 대권 후계자로 내세우는 방안을 연구한다더라는 기발한(?) 시나리오까지 나돈다. 소문에 불과하겠지만 얄팍한 정략정치, 꼼수정치로는 국민의 마음을 살 수 없다. 왜 이 시점에 민생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정치게임으로 혼란을 조성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노 대통령의 대화 제의는 순서부터 잘못됐다. 만남이 먼저 있고 그 자리에서 연정이든 뭐든 제의했어야 수순에 맞다. 만나기도 전에 "나는 한나라당과 손잡겠다"고 만방에 공표한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라 할 수 없다. 굴복 강요나 다름없으니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특별한 상황변화가 없는 한 회담은 뻔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기 쉽다. 노 대통령은 연정 제의의 진정성을 설명하고, 박 대표는 반대한다. 과거에 숱하게 보아온 '흑백 정치영화'의 복사판인 셈이다. 여야 양 진영은 더 나아가 서로 자신들의 입장 강화를 위해 바람몰이와 쐐기박기로 맞서고 있어 극적 반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들고간 메모만 읽고 얼굴 붉히며 헤어진 뒤 더 으르렁거리는, 대화 아닌 대결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럴 바엔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다. 대결정치.소모정치.소란정치를 "우리 능력으론 해결할 방도가 없소"라는 무능과 무대책을 확인하는 의식이 될 텐데 그런 회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 대통령 취임 2년반 만에 열리는 여야 영수회담이다. 최소한의 희망 메시지라도 나와야 마땅하다. 노 대통령은 줄기차게 대화와 타협에 의한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가자고 역설해 왔다. 이번 연정 제안을 하면서도 또다시 강조했다. 솔직히 대통령으로부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이다. 정작 대통령 본인은 야당을 상대로 대화와 타협 모습을 한 차례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의 '대화와 타협'주장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줄 의무가 있다. 남에게 주문만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진정한 의미의 대화정치에 나서야 한다.

대화에서 중요한 요소는 듣기다. 노 대통령은 가위 화술의 달인이란 칭호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달변에 자신 있어 그런지 요즘엔 아예 강의를 하는 것 같다. 강의는 대화가 아니다. 우선 듣겠다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설복하고 이기겠다는 전투적 자세로는 아무리 "새 정치문화"를 외쳐도 공허할 뿐이다. 연정을 논의하되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체면을 구기더라도 기왕의 제안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권력까지 양보하겠다는 마당이다. 제안 하나 거둬들이기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화정치의 새 틀을 마련하는 데는 박 대표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주어져 있다. 나라발전.정치발전에 맞는 제안이 나온다면 욕을 먹더라도 응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구차하게 배석자 운운하지 말고, 노 대통령이 수용할 수 있는 대안을 준비하여 1대1의 '끝장 대화'에 나서라고 권하고 싶다.

"눈과 눈을 바라보면서 대화해보라." 동티모르의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던진 권유다. 노 대통령은 양보할 내용을, 박 대표는 대안을 각각 준비하여 신뢰의 '눈과 눈' 대화를 한번 실험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