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종말과 시작(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마지막 달력장이 퇴색한 벽위에서 낙엽지고 있읍니다. 한해가 끝나가고 있는것입니다. 무엇이든 끝이라는 말속에는 이상한 서글픔이 잠겨있읍니다.
하루해가 지는 낙조가 그렇고 한 계절이 끝나가는 쌍절기가 그렇습니다. 시간만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영화가 끝나는 영사막위에는 공허의 엔드마크가 찍힙니다. 웃음도 눈물도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찢어버린 좌석표처럼 이제는 모두 구겨져버린 흥분이 빈 복도에 뒹굴고 있읍니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는 이같은 빈 의자의 적막을 발견할수 있지요.
망년회장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술잔을 비우며 웃고 노래하는 밤주막에도 그러한 적막은 찾아올 것입니다. 말이 질주하던 경마장에도, 홈런과 함께 터져나오던 환호성의 야구장에도, 삼각깃발이 나부끼는 어린이놀이터에도, 사람들이 흩어지는 종말의 시각과 빈터는 있을것입니다.
모든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듯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죽음의 종말이 있는것입니다. 하루의 끝이든, 계절의 끝이든, 그리고 한해의 끝이든, 그것들은 모였다 흩어지는 우리들의 작은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는 후기구조주의자 「세이드」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그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끝」은 언제나 시작하는 그 순간속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닌것 같지만 되씹어 볼수록 많은 의미를 찾아내게 될것입니다. 원래 「시작」 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겠읍니까? 끝이 없다면 시작이란 말도 있을 수가 없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라도 끝이라는 생각없이 시작이란 말을 쓸수는 없을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한해의 이 종말감은 바로 1년전 새해 아침에 있었던 것입니다. 떡국을 먹는 순간과 망년회에서 기울이는 술잔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삶과 죽음도 역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읍니다. 흔히들 죽음을 생의 끝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생과 동시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옛날 이집트의 귀족들은 무슨 잔치가 벌어질 때마다 그 술자리에 관을 갖다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식사가 끝나고 주연으로 들어가게되면 한 남자가 나무로 인간의 시체를 만든 모형을 관에 넣어 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실물의 크기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진짜 시체를 연상했던 모양입니다. 관을 든사람은 회식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시체를 보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시면서 마음껏 술을 들고 즐기십시오. 당신도 죽으면 이러한 모습이 되어버릴톄니까!』
살아있는 즐거음, 그 절정의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서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필요로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삶의 현장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생의 강렬한 불꽃을 타오르게 한 것이지요.
당신도 들은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따금 비난의 대상이 되어있는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우리의 유흥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퇴폐적인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젊어서 힘껏 일해도 시원찮을 나이에 놀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도덕주의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문자그대로 풀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집트인이 「관」을 갖다놓고 술을 마신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위한 효과음이었을 따름입니다.
역설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은 죽을것도 모르고 오로지 일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실 때만이라도 「죽음」의 의식을 일깨워준 노래라고도 풀이 할수 있읍니다. 죽음의 의식이 단순한 쾌락으로, 자포자기의 쾌락으로 흘러버릴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삶을 깨우쳐주고 반성케하는 좋은 교사요 현명한 철인의 구질을 해줄때가 많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현대인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다. 그때문에 세상은 살벌해지고 그 죄악은 더욱 커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말감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속에서 삶을 느끼는 사람만이 생의 완전함을 지닐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