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⑩·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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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최하림 '바람이 센 듯해서'

바람이 조금 센 듯해서 커튼을 치려고

유리창 앞으로 가자 나물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희끄무레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

했습니다 그래 말했지요

나는 아침마다 설거지하고

아내를 하나로마트에 데려다 주고

중미산을 넘어 설악동을 달린다고

요즘에는 거의 매일 설거지하고

마트에 가고 설악동으로 달리는데

공기가 심하게 부풀면서 굵은 비가

쏟아지는 날은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길가에 세운다고 삶이

위태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무들이 흔들리고 흙탕물이 쏟아지고

차를 세우려면 왠지 슬퍼진다고

시 또한 슬퍼진다고 (2004년 문학과 사회 가을호 발표)

◆ 약력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62년 조선일보로 등단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76년) '시인들의 무도회'(92년)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98년)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2005년) 등 다수 ▶조연현문학상(91년), 이산문학상(99년), 현대불교문학상(2000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바람이 센 듯해서'외 8편

화려한 수사 다 털어내고 편안하고 따사로운 눈길

여기 밤새 고쳐 쓴 연애편지 같기도 하고 남몰래 눌러 쓴 일기같은 시 한 편 있다.

센 바람 불어오기에 커튼이나 치려고 유리창으로 다가서자 얼굴 하나가 언뜻 비친 것 같다. 누굴까. 잊고 지냈던 첫 사랑일까. 아니면 그 옛날 목포에서 막걸리 함께 들이켰던 옛 친구일까. 아는 것 참 많았던 친구는 진작에 세상을 떴고, 만능 재주꾼이던 친구는 상한 몸 추스르며 여태 시를 쓴다. 첫 사랑이여, 아니 벗이여. 잘 지내시는가. 나는 아침마다 설거지하고 아내를 할인점 데려다 주며 잘 살고 있단다. 하루하루 같은 것 같지만 늘 같지만은 않단다. 다만 문득 슬퍼질 때만 있단다.

최하림 시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건 1991년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많이 나았다. 경기도 양평에서 4년째, 아침마다 설거지하고 아내와 할인점 다녀오며 살고 있다. 뜸하긴 하지만 시도 발표한다.

옛날, 문우들과 '문학과 지성'을 일으키던 시절의 그는 난해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에 빠져 살던 시절의 그는 한국의 모더니즘을 대표했다. 모든 건 91년 이후 달라졌다. 오늘 그는 편안하고 따사로운 시를 생산한다. 화려한 수사도 없고 말을 부러 비틀지도 않는다.

그러나 쉬운 것은 가장 어려운 법이다. 초월한 뒤에야 여유로울 수 있다. '감정을 싣지 않고 세계와 자아 사이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는 시 세계를 추구한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깊다(김진수)'는 예심 평가도 그의 남다른 시 세계를 인정한 발언이다.

시인은 유리창에 나타난 얼굴이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환영이 아닌 이상 창에는 자신 말고는 비칠 얼굴이 없다. 시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건 다짐이었다.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자는 각오였다. "첫 사랑이나 벗이었어도 그리 말했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시인은 진작에 세상사 온갖 번민과 욕심을 내려놓은 뒤였다.

"아프고 난 뒤에 모든 욕심을 버렸습니다. 가장 먼저 시에 대한 욕심을 버렸습니다."

사족 하나. 앞서 말한 옛 친구는 순서대로 평론가 고(故) 김현과 시인 김지하다.

손민호 기자

소설 - 하성란 '웨하스로 만든 집'

◆ 작품 소개

외국으로 시집갔던 여자가 10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집은 무너지기 직전이고 골목은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골목을 따라 똑같은 모양으로 서 있던 열 채의 이층 양옥집은 30여 년 전에 시범주택 단지로 조성된 것이다. 당시엔 대한뉴스에 나올 만큼 명소였다. 입식 부엌과 마루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있는 집이었다. 붕괴되는 집을 통해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상을 상징적으로 그렸다는 평이다.

(문예중앙 2005년 봄호 발표)

◆ 약력

▶1967년 서울 출생 ▶96년 서울신문으로 등단 ▶장편 '식사의 즐거움'(98년) '삿뽀로 여인숙'(2000년) '내 영화의 주인공'(2001년), 소설집 '루빈의 술잔'(97년) '옆집 여자'(99년)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2002년) ▶동인문학상(99년), 21세기문학상(2000년), 한국일보문학상(2000년), 이수문학상(2004년)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웨하스로 만든 집'

반듯하나 쉬 부서지는 과자 자본주의 허술한 단면 포착

작가 하성란. 그가 요즘 변화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소설의 기본 시제인 과거형을 버리고 현재형 시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정치(精緻)한 묘사로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형식도 신선했지만 내용은 더 참신했다. 90년대 주류를 형성했던 후일담 문학이 엘리트의 지적인 고민에 치중했다면 그는 덜 배우고 덜 가진 이들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그들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에서 90년대 사회는 새로이 해석됐다.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은 예전과 다른 문체를 지목한다. 문장이 한참 길어졌고 무덤덤하다는 것이다. 현재형 시제도 고집하지 않는다. 작가의 생각을 물었다.

"이야기의 소재가 달라졌습니다. 10년 동안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 이젠 다른 얘기 할 때도 됐죠(웃음). 문체가 달라진 건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용에 따라 문장도 달라집니다."

후보작에서도 변화의 징후가 발견된다. 그러나 징후에 머문다. 변화한 것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보인다는 얘기다. 문체의 변화는 이내 확인되지만 삭막한 도시를 살아가는 무명씨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심사위원들은 "시대를 해석하려는 자세가 예전보다 좀 더 적극적인 것 같다(김미현)"고 분석했다.

소설에서 두 부분이 특히 궁금했다. 왜 하필 '웨하스'일까. 모양새는 반듯하지만 한 입만 물면 바로 으스러지는 이 과자에서 자본주의의 허술한 단면이 읽힐 수도 있겠고, 원래 웨이퍼(Wafer)가 맞는 말인데 우리 사회에서 웨하스로 정착된 것 자체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작가는 담담하게 "아이들은 웨하스를 보면 집을 짓고 싶어해요"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내내 진지하고 덤덤한 어투를 놓지 않던 작가는 마지막 문장을 '자매들이 발뒤꿈치를 들면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니 조심해!'라고 맺었다. 작가의 설명이다.

"여자애들이 깔깔대는 목소리는 소설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전체로 심각한 듯 보이지만 소설의 설정은 만화적이에요.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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