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충신장』 중의 한사람 무림은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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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702년 일본 아꼬(적수)성의 젊은 영주「아사노」(천야내의두)는 뇌물을 바치지 않았던 탓으로 에도(강호)성의 노신 「기라」(길량상야개)에게 모욕을 당한다. 「아사노」는 젊은 혈기에 분을 참지못하고 그만 궁중의 금기인 칼을 뽑는다. 궁중에서 칼을 휘두른다는것은 역적죄를 범하는 것이다. 「아사노」는 결국 할복하고 영지도 몰수당했다.
영주를 잃은 가신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다께바야시·유이시찌」(무림유칠) 등 47명의 가신들은 주군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1년10개월동안의 와신상담 끝에「기라」의 목을 벤다.
그 목을 「아사노」의 영전에 바쳐 한을 풀어준다. 이들 가신들도 물론 국법을 어긴죄로할복자살해 47명 전원이 주군의 뒤를 따라갔다.
쥬우신꾸라(충신장). 충성심을 말할때 일본인들은 이 쥬우신꾸라를 언제나 예로 든다. 그래서 한국의 춘향전만큼이나 일본인들은 이 쥬우신꾸라의 얘기를 즐켜 입에 담고있다.
이들의 영혼은 지금 동경시나까와(품천)역 부근에 있는 센가꾸(천악)사에 안치되어 있다. 지난 15일은 바로 47명의 「아꼬낭사」들이 거사를 일으킨날.
이날을 맞아 동경 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은 동경신문과의인터뷰에서 「아꼬낭사」47명 가운데 적장「기라」와 대결하여 그의 목을 벤 사람인 「다께바야시」는 바로 한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최원장에 따르면 「다깨바야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사람은 에도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무로」(실?영)씨. 그는 적수의인록이라는 책에서 『「다께바야시」의 선조는 한국인이다. 성은 모른다. 선조가 살던 곳은 무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다께바야시」의 할아버지가 포로로 일본에 잡혀왔고 손자인 「다께바야시」는 세월이 흘러 일본인이 됐다』고 분명히 하고있다.
「다께바야시」의 할아버지 이름은 우이관씨. 그는 일본에 끌려와 일본인과 결혼했고 아들의 이름은 부인의 성인 「와따나베」(피봉)를 따 도변간우위문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최원장은 「이젠 역사의 왜곡을 바로집는다는 뜻에서도 「다께바야시」을 한국인 이라고 분명히 기술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경=신성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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