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문기<어류학자 학술원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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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남순천시의 은성학교(현 매산국민교) 졸업반때의 일이다.
하루는 서울에서 「세끼야」(관야)라는 학무국장이 학교시찰을 왔다. 그는 줄지어 서있는학생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면서 걸어오다 내옆에 선 귀엽게 생긴 학우의 옆에 오더니 『학생은 공부를 해야한다. 돈이 없어도 공부하겠다는 마음만 굳게 먹고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했다.
비록 그가 일본인이고 다른 학생에게 하는 말이지만 나는 깨달은바가 있어 서울유학을 결심했다.
가세가 그리 넉넉지는 못했으나 구체적인 학비마련계획은 뒤로 미루고 서울경신학교에 입학해 1년 다니다가 중앙학교로 옮겼다.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유행하는 인기학문·학과를 선택하기보다는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학문을 선택하는것이 좋다고 생각, 물고기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계기를 마련했다.
그래서 남들이 관심도 갖지않았던 동경제대 수산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동경대에 입학하려면 일본중학교 고교을 졸업해야 했다.
할수없이 일본명치학원 4학년을 수료한후 또 2년동안 재수를 감행하고 송산고교에 입학했다.
송산고교시절에 독어선생은 영국과 일본해군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원동력은 영국어부들이 세계3대어장의 하나인 대서양 북해어장을, 일본은 태평양극동어장을 개척한 경험과 정신력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말은 동경대 수산학과에 입학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학문을 하려면 건강이 뒤따라야한다고 생각하고 럭비부에 들어가 주장자리를 맡았고 학생회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동경대를 졸업하자 특수학과를 전공했다해서 산천남작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의 수산과 양식계장에 취직했다.
양식계장은 우리나라 물고기의 생태를 조사해 어민들에게 알려주고 어족번식·보호법을 제정하는 자리였다.
양식계 일은 대학원과 비슷하게 연구를 하면서 행정사무와 연결되어 있어서 조사연구의 보람을 어느 정도 느꼈다. 어족번식·보호법제정은 거의 도맡아했다.
해방후에는 대학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어류연구를 마음껏 하고 또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진기한 물고기를 찾으며 재물과는 담을 쌓고 평생을 보냈으나 조금도 인생에 후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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